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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상상력을 이성적인 사고에 반하는 재능으로 여기며 무시했다. 예를 들자면, 말브랑슈는 상상력을 “집안의 광녀"라는 말로 비하했고, 파스칼은 상상력을 "오류와 실수의 원인"으로 보았다. 언어와 문학이 발달한 문명사회에서 이미지는 '원형'의 불확실한 복제물이라고 멸시받았으며,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능력인 상상력 또한 그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데카르트가 생각하기에 상상력은 정신적 사고 능력과는 달리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단순한 기계적 능력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낭만주의 사조가 등장하고 예술 정신의 창의성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이런 시각에도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상상력은 통제되어야 할 위험한 재능이 아니라 자유롭게 키워나가야 할 능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대 예술의 등장과 함께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상상력은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프로이트 이론이 현대의 인식 체계 내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고, 동시에 사르트르, 바슐라르, 뒤랑을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 사상가들은 주체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며 관련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프랑스어에서는 '상상력(imagination)’과 '상상계(imaginaire)’의 개념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상상력은 이미지들을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예술 작품이나 과학, 기술 등의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는 창작과정에도 필요한 재능으로 여겨진다. 상상력은 또한 개인의 정신 발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억제되기보다는 육성되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 사회에서는 새로운 신조로까지 여겨진다. 이러한 개념은 흥미롭지만 제한적이다. 오히려 상상력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나 사고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매우 보수적이다.

상상계는 프랑스어나 영어에서 '상상적인, 가상의’라는 형용사로 표현되는데, 이 형용사는 기본적으로 오직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실재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물론 창조는 이 상상의 것을 실재의 것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서양의 고전적 인식 체계인 정신 ・ 육체, 실재 ・ 이상의 이중적 이해구조에 갇혀 있다.

레비스트로스나 뒤랑 같은 사상가들은 보다 복잡한 통합 개념을 주장하며 ‘imaginary(프랑스어의 'imaginaire')’를 명사로 사용했다. 그들은 ‘imaginary'가 상상력 같은 어떤 일종의 능력이나 과정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imaginary'는 단순히 이미지들이나 신화, 상징 등을 축적해놓은 정신적인 ‘이미지들의 창고'가 아니라, 논리와 합리성을 포함한 모든 정신 활동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범주', 다시 말해 이미지들을 조직화해 체계와 원형, 상징, 신화 등을 만들어내는 범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재 구조에 이미지들을 포함시키는 역동적인 과정인 ‘imaginary'는 개별적(빅토르 위고의 상상계)으로나 집단적(부족이나사회, 계급등의 집단적 상상계)으로 적용될 수 있다. ‘imaginary' , 즉 상상계는 상징화 과정의 기초를 이룬다. 사물이나 행동,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이 과정을 거치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실재(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행위, 공산품, 사회적 관계 등)가 모두 이 상상계를 토대로 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상상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디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조인류학은 불변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사회의 언제 어디서든 동일한 문화적 아이템을 추구한다. 질베르 뒤랑의 유명한 저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상계 연구는 ‘일군(一群)’의 ‘인류학적 구조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항상 같을 것이라 여겨졌던 이 일군의 구조들이 전 인류와 역사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같은 기본 색과 기법을 쓰지만 전혀 다른 작품을 그려내는 화가들과 같다고 보면 된다. 우리의 상상계는 그만큼 다양하게 표현되며, 이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다채로워 진다.

이런 현상과 그 현상을 이끌어낸 '상상계'를 연구해보면 어떤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것에 연루된 힘과 동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집단의 꿈과 환상, 제도와 전통의 원천을 접하고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얼굴은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의 바탕이 되며,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고 또 수많은 제도와 유행, 사상 등에 그 형태를 부여하는 위대한 인간의 상징이다. 이것이 바로 얼굴을 '상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측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철학과 정신분석, 미학, 인류학 등의 관점을 통해서도 봐야 하는 이유다. 얼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실재' 얼굴을 바라볼 때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한용운의 시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얼굴은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인 것이다. 우리 인간세상에서 그 어떤 실재보다 '정신적인' 오브제가 바로 얼굴이다.

얼굴의 이런 이중적인(물질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면은 '상상(想像)'이라는 단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상상은 “어떤 것(相)에 이르기 위해 마음(心)을 기울여 그 형태(표상, 이미지)가 정신에 나타나도록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상상에 대한 장 폴 사르트르의 이론을 상기시킨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상상은 마음속의 이미지를 '제시'하기 위한 실재의 '무화(舞化)'이자, 정신의 고의성에 대한 것이다. 상상은 물리적 이미지를 정신적 마음으로 불러들이는 매우 신비로운 과정인 것이다. '상상' 이라는 단어는 마치 이미지의 본질인 이중성을 표현하려는 듯,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동음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의미(기호)'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볼 수 있다. 기호, 이미지, 상상, 얼굴⋯⋯. 이 중에서 얼굴은 상상과 의미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특별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육체의 여느 부위와 마찬가지로, 얼굴 또한 태어날 때 주어진다. 또한 얼굴은 감각, 감정, 느낌 등의 내부 영역과 외부 세계가 만나는 접점으로, 인간사회에서의 소통과 세상에 대한 적응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얼굴이 최근의 역사적인 ‘발명품'은 아니지만 사회문화적 구성체라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얼굴을 하나의 관념으로 보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눈과 이마, 코, 입, 귀가 있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얼굴'이 될까?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를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이유는 내게 얼굴이 있기 때문일까? 이제부터 우리는 만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점과 얼굴과 관련된 모든 쟁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해체, 아니 어쩌면 ‘얼굴 훼손(de-faceisation)’까지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신디 셔먼에서부터 아프리카의 가면까지, 인상학에서부터 수의까지, 또 메두사에서부터 성형술과 안면 이식 수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굴이 태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근)현대적 상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매그넘 회원이자 로버트 카파상을 수상한 스티브 맥커리는 1983년부터 소련의 침공으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푸른 눈의 아프간 소녀⟩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9・11 테러 공격 이후 미국 정부가 탈레반 정권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면서, 이 이미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어 잡지에 게재되었다.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 작품은 볼 때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일까?

맥커리는 부르카로 몸 전체를 가린 여인의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잃고 우는 여인이나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 상처입은 소녀나 피 흘리는 고아를 찍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미지들은 비극을 상징하는 매우 강렬한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을 수없이 보아왔고, 또 그 대다수가 실제로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잊었다. 고통을 담은 사진들을 주기적으로 접하다 보니 더 이상 그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 어린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사진은 뭔가 다르다. 맥커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델'뿐만 아니라 완벽한 빛과 각도의 수혜를 받았다. 그는 아주 고전적인 초상화처럼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고, 가리개를 걸친 머리부터 어깨까지를 프레임에 담았다. 관객인 나의 온 신경은 시진의 중심, 즉 소녀의 표정에 가 닿는다. 이미지 속에서 소녀의 두 눈은 능동적이고 매력적인 초점이 된다. 우리는 마치 샘에 빠지듯 그 눈에 빠져든다. 물색을 닮은 청록색 눈동자는 마치 현실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얼굴 그 자체는 분명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웃음이나 눈물, 미소 등을 드러내지 않아분노하고 있는지, 기뻐하는지, 좌절감에 빠져 있는지 알수가 없다.) 오히려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듯 무표정에 가깝다. 그렇다고 꼭 무표정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눈만큼은 불가사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과 매우 대조적이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눈에 가득한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알 수 없는 열정으로 이글이글 불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의 홍채에서, 우리는 그 얼음 같은 표정 뒤에 어떤 감성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찬란한 오렌지색 불꽃을 볼 수 있다. 보면 볼수록 더 잘 보인다. 사진 속 소녀의 얼굴은 마치 수수께끼 같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사진 기술 덕분에 생생하게 표현된 그 모습은 내 마음속, 즉 나의 '내면'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아는 것은 그 사진의 제목뿐, 소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무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자신의 영혼을 내게 열어 보였다. 소녀는 내 안에 머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통해 내가 느낀 감정은 신비로움과 익명성을 덧입고서 다른 이들에게 전해진다. 나는 전쟁과 폭력, 상실과 소외의 깊은 슬픔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슬픔은 그녀나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이 사진이 부리는 마술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얼굴에서 일반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수천 번을 보더라도 이 사진이 위대한 작품인 이유다.

앞에서 얼굴이 상상과 의미의 근원에 뿌리를 두는 특별한 '기호'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얼굴이 다른 그 어떤 상상계의 구성 요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과거에 있었던 신화, 전설, 역사적 사실이 어떤 상상계로 거듭나며 오늘의 우리를 이루고 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울러 세상을 보는 눈도 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제부터 얼굴은 겉모습의 얼굴이 아니라 상상계 속에서 무한히 빛날 수 있는 얼굴이고 그것은 곧 현실로 이어 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