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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다산, 茶山, 사암, 俟菴, 탁옹, 籜翁, 태수, 苔叟, 자하도인, 紫霞道人, 철마산인, 鐵馬山人, 문암일인, 門巖逸人, 여유당, 與猶堂, 문도, 文度출생 | 17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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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6년 |
국적 | 한국 |
대표작 | 《목민심서》 |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18세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상가.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했다.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여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음모로 유배 생활을 하는데, 이때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그는 봉건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 개혁안을 내놓았다. 정약용이 저술한 일종의 행정지침서인 《목민심서》는 그의 저술을 정리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의 총애를 받다
다산 정약용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라 진주 목사 등 지방 수령을 역임한 남인파 정재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씨는 유명한 화가 윤두서의 손녀였다.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다.
다산이 태어나던 해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참변이 일어났는데, 이때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이를 공격하는 벽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다산의 아버지는 사도세자를 불쌍히 여겨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려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그래서 다산의 이름을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다산의 학문은 일취월장하여 13세 때 이미 사서삼경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서적을 두루 읽었다. 14세 되던 해에 무승지(무과 출신으로서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3품 당상관 벼슬의 승지)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고, 이름을 '약용'이라 고쳤다. 얼마 후 호조 좌랑으로 다시 기용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남인(南人)의 명사들과 가까이 지내고, 이가환·이승훈 등을 통해 이익각주1) 의 유고를 얻어 읽고 실학에 심취한다. 그리고 이익의 제자 채제공과 권철신 등을 만나고 박지원 등과도 접촉하여 그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21세에는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로 성균관의 학생이 되었다. 그 이듬해 《중용》에 관한 그의 논문이 정조의 눈에 들어 칭찬을 받았고, 임금에게 《중용》을 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에게 찾아가 물어보는 등 온 정열을 쏟아 강의했다. 그 덕분에 정조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고, 영의정이었던 채제공도 그를 남인 시파의 주도적 인물로 인정했다. 그래서 다산은 남인 사이에서마저도 시기와 질투를 받을 정도였다.
한편 다산은 이벽과 친하게 지냈다. 그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했고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였으며,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천주교 교리의 허망함을 느끼고 신앙을 버렸다. 그럼에도 28세 되던 해에는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공서파(서학을 배척하고 공격하던 세력)의 지탄을 받았다. 그들의 공격을 누그러뜨리지 못한 정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충청도 해미로 유배보낸다. 하지만 10일 만에 유배를 풀어주었다. 9월에는 정5품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한 다산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1년에 몇 번씩 수원 능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한강에는 배다리가 놓였다. 정조는 이 일을 다산에게 맡겼고, 그는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또 정조는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화성을 쌓는 일도 다산에게 맡겼다. 다산은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 발명에 몰두했다. 또 기하학을 이용하여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하여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골몰했다. 그는 마침내 거중기와 활차(도르래), 바퀴가 하나 달린 달구지 고륜차 따위를 발명하여 화성 축조에 이용했다. 정조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고 감탄하며 "거중기를 써서 돈 사 만 냥을 절약했구나!"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다산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절대적이 되었다.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각주2) , 청년층의 정약용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불충불륜
다산이 32세 되던 해인 1794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도지사) 서용보가 농민을 수탈하는 등 횡포가 심하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려왔다. 정조는 급히 다산을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했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서용보의 협잡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 일로 벌을 받은 서용보는 두고두고 다산을 미워했다.
다산이 황해도의 곡산 도호부사로 좌천되었을 때, 그곳의 민심은 흉흉하여 민란의 조짐이 팽배해 있었다. 그때 이계심이라는 사람이 수령의 부정에 항의하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관가에 들어와 따졌다. 이에 관에서 그를 잡아 가두려고 하자 일행들은 이계심을 에워싸고 대항하다가 달아났다. 그런데 이계심은 다산이 부임하는 길가에 엎드려 있다가 국민에게 끼치는 폐해로서 민막(民儛) 10여 조목을 올렸다. 이에 수종들이 이계심을 잡아 가두자고 청하나,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관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관을 범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관에서 천금으로 사들여야 마땅하리라."
다산은 이계심을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가 올린 한 고을의 민막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또 지방 행정을 쇄신하고 두창(천연두)을 예방 치료했다.
정조는 다시 그에게 승지, 형조 참의의 벼슬을 주어 자기 곁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다산에 대한 모략은 끊이지 않았다. 이때 조화진이 "이가환, 정약용 등이 서학을 받들면서 역적을 모의한다"는 상변서(일종의 상소)를 올렸다. 다산은 더 이상 반대파들의 모략을 견디기 어려워 처자를 거느리고 생가인 경기도 마재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당호를 여유당각주3) 이라 지었다.
어느 여름 날 밤, 다산이 달을 마주하고 앉았을 적에 사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임금이 보낸 심부름꾼은 한서선(漢書選) 10책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 안에 보관하시고, 다섯 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다산은 임금의 선물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보름 후 임금의 승하 소식을 듣게 되니, 이제 용은 물을 잃었고 매는 죽지가 부러진 셈이 되었다.
다산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채제공이 죽고 특히나 그를 총애하던 정조마저 세상을 뜨자 공서파는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구실로 남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다산 형제들도 끌려가 모진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다산의 둘째 형인 정약전각주4) 과 셋째 형인 정약종각주5) 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다산은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특히 형관(刑官)들은 오고간 편지 속에 나타난 괴수(우두머리)는 그의 형 약종이 아니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상(심문 담당관)이 그 편지를 보았다면 알 것 아니오?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소이다.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 동생으로서 형을 증언할 수는 없소."
위증(거짓증언)을 하면 임금을 속여서 불충(不忠)이 되고, 사실대로 말하면 형을 고발하는 불륜(不倫)이 되는 것이다. 위의 말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불충불륜에서 벗어나지는 않고 결코 거짓말도 아닌 명답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다산도 이가환과 함께 투옥되고 만다.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은 다산만이라도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서용보가 끝내 반대했다. 결국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갔다. 정약종과 이가환은 옥중에서 맞아죽었고,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황사영 백서각주6) 가 발각되자 다산의 친구이기도 한 이기경각주7) 등 공서파는 이 기회에 다산을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황해도에서 돌아온 정일환이 과거에 황해도에서 쌓은 다산의 공적을 들어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다산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는데 결국 형은 유배 중에 사망했다.
18년 만의 귀향
강진 산정에서의 귀양살이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다산은 그곳 주변의 선비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겼고, 경세학과 목민학의 정리에 골몰했다. 그러나 결코 정치나 조정에 관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뿌리를 내린 조정에서 언제 그에게 굴레를 씌워 사약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왕대비는 다산을 석방시키려 했으나 이번에도 서용보가 끝내 가로막았다. 그 후 다산의 아들 학연이 아버지의 석방을 상소했는데, 또 이기경 등이 반대하여 풀려나지 못했다.
1818년 이웃 고을에 귀양 와 있던 옛 동료 김이교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길을 떠나기 전에 그를 찾아왔다. 하룻밤을 둘이 지내며 정담을 나누었다. 김이교는 당시 세도가 김조순의 일가붙이였다. 김이교는 다산이 무슨 부탁의 말이라도 할 것 같아 기다렸다. 그러나 동구 밖 10여 리를 따라 나와 전송하면서도 다산은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김이교는 참다못해 입을 떼었다.
"나에게 부탁할 말이 없소?"
이에 다산은 김이교의 부채를 잡아당겨 시를 써주었는데, 그 끝 구절은 이러했다.
대나무 몇 가닥에 새벽달 걸릴 적에
고향이 그리워서 눈물 줄줄이 맺히오.
김이교는 이 부채를 들고 김조순을 찾아갔다. 그는 김이교가 한껏 펼쳐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를 빼앗아 글귀를 읽더니 "이것은 정모(丁某, 정약용을 지칭)의 글귀로구나" 하며,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마침내 김조순이 주선하고 이태순이 상소를 올림으로써 다산은 긴 유배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18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집은 황폐해 있었고, 곱던 아내는 어느새 낯선 노파로 변해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다산은 평생을 당파 싸움에 시달렸지만 스스로는 결코 당쟁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조상이 당쟁의 제물이 되지 않았음을 늘 자랑했고, 그 아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다산을 공격하던 이기경이 경원으로 유배되었을 적에 그의 동료들은 이를 무척 통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로다. 우리의 재앙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조짐일세."
그리고 늘 이기경의 집에 찾아가 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기경이 모친상을 당하매 가진 돈을 다 털어 1,000냥이라는 많은 부조금을 냈다. 또 아무도 이기경을 상대하지 않을 때, 남몰래 그에게 다가가 다정한 말을 나누기도 했다.
다산은 술을 즐겼는데 술이 화기와 원기를 돕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술을 보약으로 본 그는 아들에게도 술을 마시되 곤드레만드레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이런 자세가 그를 모진 고난 속에서도 비교적 장수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것은 74세 때였다. 고종은 《여유당전서》를 모두 필사하여 내각에 보관하도록 하고, 그에게 장헌대부, 규장각제학(정2품)을 추증하는 한편 시호를 문탁(文度)이라 했다.
철학 속으로
정약용은 남인 양반 출신으로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했으나, 이익의 유고를 읽고 나서부터 실학에 뜻을 두었다. 실학은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의 줄임말로써,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당시 지배계급의 학문이던 성리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비판하면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李用厚生,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국민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에 관해 연구하던 학문이다. 그는 북학파(조선 영·정조 때에 청나라의 앞선 문물제도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학파로, 특히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에 관심을 쏟았음)의 자연과학 지식을 받아들여 '지구는 둥글고 자전한다'고 주장하고 오행설을 부정했다. 말하자면 종래의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주자학의 공허함을 비판하는 한편, 과학적이고도 고증학적인 태도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능이나 이기적 욕망을 인정하며,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백성의 뜻이라면 왕도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관리들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해 기록한 《목민심서》는 당시 양심적인 지방 수령들의 필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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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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