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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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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78년 |
국적 | 프랑스 |
대표작 | 《참회록》, 《에밀》 |
프랑스 계몽기의 사상가이자 작가. 프랑스혁명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문명이 자연적인 인간 생활을 왜곡시켜서 사회적 불평등을 조성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사회악을 산출했다고 지적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제창했다. 세계 3대 고백록으로 꼽히는 《참회록》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과 자신이 저지른 비행과 난잡한 성생활 등 치부까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교육 사상가였으나 자녀 5명을 고아원으로 보내버렸다. 자연 중심의 교육 이념을 제시한 《에밀》 발표 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책을 읽고 농사 짓고 우유 짜는 부인을 흉내냈다는 일화도 있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고,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꿈꾸었으나 실패했다.
모성애를 그리워하는 변태
루소는 자신의 저서 《참회록》에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숨김없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일생 중 가장 결정적인 체험은 소년 시절 여자 가정교사에게 매 맞은 일이다. 그때 맞은 매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최고의 쾌락이 되었다. 그러나 감히 그는 여자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의 봉사를 해달라고 부탁하지는 못했다. 그는 또 평생 그를 따라다닌 자위행위의 버릇과 음부노출증(이로 인해 그는 몽둥이찜질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에 대해서도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약간은 자랑스럽게까지 기록하고 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인 아버지와 아름답고 교양이 높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소는 일생 동안 모성애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를 낳은 지 열흘도 못 되어 죽은 그의 어머니가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이 일이 그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된 셈인데, 그 스스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태어났고, 따라서 나의 출생은 나의 여러 가지 불행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
루소는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꾸었다는 데 대해서 평생 회한과 자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가 없는 쓸쓸한 적막감을 아버지와 함께 달래곤 했다.
아버지가 "자! 장 자크, 우리 엄마 이야기나 해볼까?" 하는 말을 꺼내면, 조숙한 루소는 "그러면 우리는 또 울게 되지 않아요?" 하고 대답했다. 이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음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어머니이자 소꿉동무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밤늦도록 책을 함께 읽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서야 "얘야,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자. 내가 너보다 더 어린아이 같구나" 하고 말했다.
루소는 마침내 어머니를 찾았다. 16세쯤 되던 해에 만난 드 바렝 부인이 그의 성격과 일생을 결정지은 인물이다. 상류사회에 속하긴 했으나 약간 어리석은 편이었던 드 바렝 부인은 마침내 루소의 어머니가 되었다. 13년이나 연상인 그녀는 루소를 '어린것'이라 불렀고, 루소는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엄마'를 갖고 있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드 바렝 부인은 루소를 일시적이나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도 하고 거처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그의 애인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루소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녀에게는 바람기가 있었던 것이다. 루소는 10여 년에 걸친 그녀와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의 매춘부와 난잡스런 관계를 맺는다. 이때 그는 매독에 걸릴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다섯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버린 교육 사상가
그 후 파리의 하숙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한 순박한 처녀를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애써 글을 가르쳐주었으며 23년 동안의 동거 끝에 마침내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5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루소는 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렸다. 자식들이 너무 소란스러운 데다, 양육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교육 이론가였으나, 자신의 자녀 교육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그렇게 위대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리고 귀부인들을 쫓아다니는 그의 기질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부부라는 단단한 결속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루소의 삶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열광적인 활동에 투신하는가 하면, 꿈속을 헤매며 소일하거나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며 세월을 보냈다. 또 신경쇠약에 걸려 좌절 속에서 보내는 동안 악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는 가출한 젊은이가 가질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직업을 전전했다. 작가 지망생, 수공업자, 신부의 조수, 음악 교사, 시종, 비서, 유랑 극단, 토지 등기소 직원 등을 전전하다가 외교업무의 서기가 되기도 했고, 악보 써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지휘자, 오페라 작곡가, 희곡작가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베르사유궁전에서도 상연되었는데, 이때 그의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복장은 참석자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렇게 안정되지 않은 생활 때문에 여러 번 거처를 옮겨야 했으며,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온갖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도둑질, 사기, 무위도식을 일삼는가 하면 얌전한 여자에 대해 중상모략을 자행했고, 삼류 소설책을 무분별하게 읽어대기도 했다.
30대 초반에 루소는 음악가로서 입신출세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742년 파리에서 음악에 관한 저서를 낼 때 큰 기대를 걸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귀족 부인들의 사교 장소인 살롱(보통 상류 가정의 객실에서 열리는 사교적인 집회)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또 디드로(18세기 프랑스의 무신론적·유물론적 계몽주의 사상가)를 비롯하여 달랑베르(프랑스의 수학자·철학자·저술가) 등과 같은 백과전서파와 알게 되고 사교계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파리의 사교계가 가식과 허영에 가득 차 있음에 매우 실망했다.
진보에 대한 부정
루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는 37세가 되던 해, 파리 교외의 반센 성에 감금되어 있는 디드로를 방문하는 길에서 찾아들었다. 디드로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그곳에 갇혀 있었는데, 이미 루소는 그와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다. 루소는 그를 방문하러 가는 도중, 디종 학술원이 내건 〈예술과 학문의 부흥이 도덕의 개선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라는 현상 논문 제목을 보고 어떤 영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뜨거운 감격과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한동안 망연자실한 채로 있었으며,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무수히 많은 생각이 엄청난 힘으로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가슴을 죄는 불안감이 엄습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어서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거기서 30분 동안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 있었는데, 일어섰을 때 나는 내 상의가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이때 떠오른 착상을 즉시 논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소의 돌발적인 논문은 점잖은 학술원 회원들이 기대하는 내용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문화의 진보성에 대한 열광적인 찬가를 기대했지만, 루소의 견해는 진보에 대한 당돌한 부정이었다. 루소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계몽주의의 빈껍데기를 과감히 벗겨버린 것이다.
이 현상 논문은 불과 반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일등으로 당선되었고, 연말에는 출판되기까지 했다. 물론 볼테르각주1) 같은 사람은 "어린 학생들의 글짓기와 흡사한 이런 논문은 도대체 읽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당시 사상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때부터 루소는 사상가로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같은 학술원에서 다른 주제의 현상 논문을 모집하는데, 이때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제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아주 예리한 논법을 구사하여 처음의 논문보다도 더 대담하게 사회비판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낙선하고 말았다.
고독한 천재
자유기고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는데도 루소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더욱이 예전부터 지니고 있던 그의 우울한 기질이 악화되어 병고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는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요양을 하기에 이르지만, 그의 지친 몸과 마음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몰려드는 방문객을 모두 거절한 채 스스로를 점점 더 고립시켰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 볼테르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아주 분명하게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고 썼다. 볼테르도 이에 질세라 루소를 '천치, 괴물, 사기꾼, 문학의 독버섯, 세기의 배설물, 야수, 중상모략꾼'이라고 욕하며 강하게 응수했다.
루소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켜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일종의 교육소설인 《에밀》 때문이다. 자기 자식들을 고아원에 보내버린 루소가 교육론을 저술한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20년 동안의 사색과 3년 동안의 집필로 완성된 《에밀》은 자연 중심의 교육 이념을 제시하여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책을 읽은 후 농사를 짓고 우유 짜는 부인네의 흉내를 냈다는 일화에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파리 고등법원은 종교적 이유로 《에밀》을 불태워버리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루소에게도 체포 명령이 발부되었다. 루소는 비밀리에 도망하여, 약 4년 동안 유럽 각지를 유랑하다가 흄(18세기 스코틀랜드의 경험론 철학자, 역사가, 경제학자, 저술가)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루소는 흄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고, 결국 이 고매한 친구와 다투고 헤어졌다. 그 후 1770년 여름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의 겉모습도 조금 괴상해졌는데, 이상야릇한 아르메니아 식 복장과 털가죽 모자를 쓰고 다녔다.
루소는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나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고 믿고 있다. 내가 남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말했는데, 자신의 말대로 그는 어떻든 특이한 인간이었다.
1778년 루소는 죽음을 맞았다. 그는 "자연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말하며 창문을 열게 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나는 형제도, 가까운 친구도, 이웃도 없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 남게 되었다. 평소 남과 사귀기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나를 그들끼리 작당하여 외진 곳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나를 생매장시키고 즐거워하지 않을까?"
그러나 죽은 후에 루소의 명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 그의 시신은 판테옹각주2) 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성장 과정과 삶에 얽힌 일화, 심지어는 그가 저지른 비행과 난잡한 성생활까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은 《참회록》은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철학 속으로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약자가 생길 여지가 없고, 꾸밈없는 덕이 지배할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떤 사람이 일정한 땅에 울타리를 쳐놓고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 번 땅을 손안에 넣은 뒤로 주인과 노예가 생겨나고, 폭력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여기서 부자인 부르주아는 "약자가 억압받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뭉치자!"고 주장했고, 순진한 사람들이 이 제안에 동의해주었다. 이렇게 국가와 법률이 생겨났고, 약자에게 새로운 올가미가 씌워졌다. 반대로 부자들이 법적인 지배권을 자의적인 것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인간 불평등이 영속화되기에 이르렀다.
부자와 빈자를 갈라놓은 재산의 발생이 인간 불평등을 가져온 최초의 화근이었다면,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갈라놓은 주종 관계가 제2의 화근이었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를 제도적으로 대립시켜 놓은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이 제3의 화근이다. 이상의 것들이 모든 불평등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이가 어른에게 명령을 내리고, 미련한 자가 현명한 자를 다스리며, 대중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부자들은 호의호식하며 지나친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루소는 인간의 자유와 국가권력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당한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는 전체의 합의, 즉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동의다. 그리고 이 합의에 따라 바로 사회계약이 성립한다. 이 계약에 의해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세워지고,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이 생겨난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따라서 국민만이 (국가)주권의 유일한 담당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 주권자의 일반의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한 방법으로는 투표가 있다. 우리는 투표 행위를 통해 모든 국가 구성원의 항구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확인된 이 의지가 곧 일반의지(一般意志)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지도자가 선발된다. 그리하여 만일 나의 의사와 반대되는 견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면 곧 내가 그동안 착각했다는 것, 즉 내가 일반의지로 간주했던 것이 실은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교육론에서 루소는 이렇게 주장한다. '어린이는 자유롭게, 오직 자기의 소질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반(反) 자연, 이른바 관습과 규칙 등은 거부해도 좋다. 교육의 과제는 인간의 정상적 발달을 방해하는 모든 사회생활로부터 그 영향을 제거하는 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보를 말하고 문화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동안, 루소는 역사와 문화의 모든 성과들을 비난하고 자연으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이런 의미에서 루소야말로 계몽사조를 대표하는 천재적 인물임과 동시에 가장 신랄한 계몽주의 비판자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 비평적 경향은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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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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