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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온건주의자인 4선의 정세균 의원이 7.6전당대회에서 통합형 리더십을 기치로 선명성을 내건 추미애 의원을 압도적 표차로 꺾고 대표로 선출됐다. 과도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정세균호(號)’가 힘찬 닻을 올린 것이다. 정 대표와 함께 지도부를 이끌 5명의 최고위원에는 송영길 박주선 김진표 의원과 김민석 안희정 의원이 뽑혀 386그룹과 구민주계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정 대표 체제는 안으로는 구여권 분열구도에 마침표를 찍고 내부 통합과 함께 사분오열된 개혁ㆍ진보세력을 하나로 결집시켜 내는 한편으로 밖으로는 소수야당의 한계를 딛고 거대 여당을 견제, 정국의 한 축으로 도약해야 하는 무거운 숙제를 안고 출발했다. 정 대표 개인으로서도 대표직은 대권주자로 성공적으로 발돋움하느냐 여부를 가르는 바로미터라는 점에서 중차대한 도전이었다.
5월 29일 3선의 원혜영 의원이 원내 사령탑인 원내대표로 선출된 상태였다. 새로운 지도부의 출범으로 386그룹 등 합리적 온건주의 그룹이 신(新) 주류로 급부상하는 등 당내 세력구도도 재편됐다.
정 대표는 취임 초기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을 잇달아 예방하는 등 전직 대통령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며 대선, 총선 과정에서 흩어졌던 전통적 지지층 복원에 나섰다. 그 연장선상에서 9월 10일 여의도로 당사를 이전, 4년 6개월 만에 다시 여의도 당사 시대를 다시 열었다.
합당에 따른 물리적 결합을 화합적 결합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내부 통합에도 힘을 쏟았다. 정 대표는 특히 ‘뉴민주당’의 깃발을 내걸고 ‘준비된 수권정당’으로서의 새로운 실험을 본격화했다. 투쟁 일변도의 과거 야당의 모습에서 벗어나 싸울 것은 단호하게 싸우되 협력할 것은 확실히 협력하는 야당의 모델을 정립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취임 직후 국회 등원을 전격 결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대안야당’과 ‘선명야당’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제1야당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겠다는 복안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정 대표는 9월 25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단독회동을 갖고 경제살리기에 대한 초당적 협력에 의견을 모았다. 대척점에 서 있는 청와대와 야당이 국정 동반자로서 머리를 맞댔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자리였다.
그러나 이날 오찬 회동은 선명성 부족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정 대표 리더십을 둘러싼 후폭풍이 몰아닥쳤고, 이는 곧 지도부의 리더십 위기로 연결됐다. 당 안팎에서는 “야성이 부족했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이어 구주류인 김근태계와 정동영계, 천정배계가 삼각편대를 이룬 비주류연합체격인 민주연대가 같은 달 30일 발기인대회를 가지면서 계파별 세분화 조짐이 본격화됐다.
당의 정체성 논쟁을 매개로 한 주류와 비주류간 갈등 구도가 표면화된 것이다. 현 정부의 계속된 실책에도 불구, 민주당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제1야당으로서 정국 주도권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내부 비판도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불거진 악재인 김민석 최고위원 수사에 대해 민주당은 선명성 회복을 벼르며 영장실질심사 거부 등 초강경대응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비리 정치인 감싸기라는 여론의 역풍에 직면했다. 연말 정국인 12월 초 민주당이 새해 예산안 조기 처리에 합의한 것을 두고도 강경파가 반발하면서 지도부의 리더십은 또 한 번 상처를 입게 됐다.
야당 데뷔 첫해인 2008년 민주당의 부진한 성적표는 1년 내내 10% 대 중ㆍ후반대를 맴돈 당 지지율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강부자ㆍ고소영 내각’ 공세를 시작으로 정부ㆍ여당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이렇다 할 반사이익도 누리지 못한 셈이다.
소모적인 노선 투쟁 속에 정작 ‘집토끼’며 ‘산토끼’며 모두 놓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자성어린 목소리도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수적 열세라는 태생적 한계에 더해 중요한 고비마다 대여 투쟁 전선에서 무기력증을 드러내면서 제1야당의 존재감을 심어주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열린우리당계와 구 민주당계가 여전히 감정의 깊은 골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는 등 화학적 결합도 미완에 그쳤다. 여기에 눈에 띄는 대선후보급 스타 정치인의 부재라는 고질병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세밑 정국에서 벌어진 쟁점법안 입법전쟁에서 ‘MB악법’ 결사저지를 목표로 승부수를 띄우며 반전을 시도했다. 새해를 불과 며칠 앞둔 12월 26일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하는 등 초강경 노선으로 배수의 진을 친 것. 이 과정에서 정 대표도 대여 투쟁을 진두지휘하며 강경 투사 이미지로 변신했고 ‘시한부’로나마 쟁점법안의 처리를 막아내면서 리더십 기반을 공고히 했다. 개인적으로도 잠재적 대권주자로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가외소득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선명성 부각을 통한 전통적 지지층 결집이라는 성과 뒤로 ‘폭력정당’, ‘발목잡기 정당’이라는 여론의 따가운 역풍이 민주당 앞으로 서서히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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