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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모궁 사도세자의 사당, 景慕宮
    떠난다. 공회빈 윤씨의 관은 그대로 둔 채였다. 다음 해에 돌아와 시신을 창경궁 후원에 가매장했다고 하여 함춘원 곳곳을 파헤쳤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 영조 때 이곳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가 들어섰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위치 :
    동부 숭교방(조선시대)
    소재지 :
    종로구 대학로 95, 103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뒤
  • 사도세자의 죽음, 임오화변 壬午禍變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 어찌 국본(國本, 왕세자)을 흔들려 하십니까.”라고 아뢰자 영조는 더욱 진노했다. 마침내 영조는 휘령전 뜰에 갖다놓은 뒤주 속에 직접 세자를 가두었다. 뚜껑에는 자물쇠를 채웠고, 널빤지로 막고 못을 박았다. 이어 포도대장 구선복(具善復) 등으로 하여금 뒤주를 지키도록 했다...
    시대 :
    1762년
  • 장헌세자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
    노론(老論)의 일당전제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모략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사도세자사건).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이복형인...
    출생 :
    1735(영조 11)
    사망 :
    1762(영조 38)
    본명 :
    이선(李愃)
    국적 :
    조선, 한국
    종교 :
    유교(성리학)
    자 :
    윤관(允寬)
    호 :
    의재(毅齋)
  • 범벅타령
    생겼다. 간부라는 뜻의 경상도 방언 '훗사나'를 따서 〈훗사나타령〉이라고도 한다. 간부와 함께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나타나자 아내는 간부를 뒤주에 숨긴다. 남편은 뒤주를 태워버린다며 짊어지고 나가 간부를 혼낸 뒤 놓아주고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서방질한 죄를 묻는다. 아내는 "무정하다 낭군님요/훗사나 하나...
    도서 다음백과 | 태그 한국음악
  • 추수 秋收
    댈 때에는 논에서 벤 벼를 다발 그대로 나누며 소작인은 타작을 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관행을 ‘당갈림’이라고 한다. 떨어낸 나락은 마당 한구석에 ‘나락뒤주’를 설치하고 이에 갈무리하고 필요한 때마다 꺼낸다. 따라서, 추수 무렵에 세워진 나락뒤주는 봄쯤되면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다. 나락뒤주는 땅바닥에 짚을...
    유형 :
    개념
    분야 :
    경제·산업/산업
  • 황윤석 생가 黃胤錫 生家
    부엌으로 쪽문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집은 이 방을 통하여 부엌과 안방이 연결된다. 또한 2칸의 대청 북쪽 툇칸에 짜놓은 붙박이 뒤주도 이 집의 큰 특징이다. 뒤주 상부 뒷벽에는 벽감을 만들어서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당초에는 사당이 안채 뒷편에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벽체는 문을 제외하고 모두 판벽으로...
    유형 :
    유적
    분야 :
    생활/주생활
  • 성주 수성리 중매댁 星州 水成里 中梅宅
    해저리 김씨댁 등의 건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1900년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예라 할 수 있다. 고방채는 방형 4칸의 고방을 중심으로 좌측에 마구간과 뒤주가 각 1칸, 우측에 방앗간과 헛간이 있다. 판벽한 뒤주 뒤편에 내측(內厠)이 있고 주변에 돼지우리, 장작 쌓는 자리,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에 받치는...
    유형 :
    유적
    분야 :
    생활/주생활
  • 2008년 쥐의 해, “부자 되세요~!”
    담판을 벌이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 생쥐는 미륵에게 샘물 찾는 법과 부싯돌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미륵에게 “이 세상에 있는 뒤주뒤주는 죄다 네가 차지해라”는 약속을 받는다. 뒤주는 바로 쌀독이다. 옛날에는 먹는 게 아주 중요했던 시절이라 쌀독을 차지한다는 말은 곧 가장 큰 재산...
  • 영조의 비호 아래 노론 척신 정권을 지키다, 홍봉한 익익재(翼翼齋), 洪鳳漢
    구관당상, 평안도 관찰사, 좌참찬 등을 지냈다. 1761년(영조 37)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1762년(영조 38)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났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는 태도를 취해 반대 정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 덕분...
    도서 재상열전 | 태그 한국사 , 조선
  • 양양 이두형 가옥 襄陽 李斗衡 家屋
    주로 하였고 남자들은 안채 정면으로 하였다. 측면 마당에는 자연석 초벌대기단에 덤벙기초를 한 팔작지붕 형태의 두 칸 부속사가 있다. 여기에는 바닥이 우물마루, 벽은 판벽으로 된 뒤주간과 온돌이 깔린 행랑방이 있다. 행랑방은 정자형 창호가 전면에 있고 측면에는 뒤주간으로 통하는 미닫이가 있다. 참고문헌
    유형 :
    유적
    분야 :
    생활/주생활
  • 쌍산재
    전남 구례군 소재 고택 한옥으로 그 의미는 운영자의 고조부님의 호(쌍산)를 빌어 쌍산재이다. 가훈으로는 "집안 화목"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특히 안채의 뒤주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과거 춘궁기 시절 봄에는 맥류를 가을에는 미곡을 채워 두고 식량이 부족한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그 해에 이자 없이...
    위치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장수길 3-2
  • 정조 형운, 正祖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는 그를 유난히 아꼈는데 이것은 아들인 사도세자의 행동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영조는 1762년 아들을 뒤주에 가두는 벌을 내렸고 사도세자는 한여름에 뒤주 속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당시 정조는 열 살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세손이던 정조는 세상을 뜬 영조...
    출생 :
    1752년
    사망 :
    18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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