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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6. 3. 21, 멕시코 오악사카 산파블로겔라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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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2. 7. 18, 멕시코 시 |
국적 | 멕시코 |
요약 멕시코의 국민적 영웅이자 대통령(1861~72 재임).
목차
접기개요
대통령 재임기간중 3년 동안(1864~67) 막시밀리안 황제 치하의 외세 점령에 대항해 싸웠으며, 민주적인 연방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입헌개혁을 추진했다.
초기활동
인디언이었던 부모는 그가 3세 때 죽었다.
12세 때 그동안 키워준 삼촌 곁을 떠나 오악사카 시의 누이에게 갔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원래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1829년 오악사카예술과학대학에 들어가 법학과 과학을 공부했다. 1831년 법학 학위를 받았고 시의회에서 첫 공직을 얻었다. 나무랄 데 없이 정직해서 결코 공직을 이용해 자기 개인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런 그의 절제된 생활방식은 1843년 자신보다 17세나 어린 오악사카 소녀 마르가리타 마사와 결혼한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정치는 곧 그의 평생직업이 되어 그는 주의회와 전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841년에는 판사가 되었으며 주지사로 재직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무렵 후아레스는 정강(政綱)을 통해 멕시코의 제반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를 정상화하는 길은 교회와 토지귀족이 쥐고 있는 숨막히는 독점경제를 자본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로마 가톨릭교). 또한 연방체제에 기초를 둔 입헌정부 형태를 채택해야만 정치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53년 선거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개혁가들은 절박한 운명에 처해졌다. 후아레스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추방되었다. 1853년 12월부터 1855년 6월까지 그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다른 멕시코인들과 사상을 교환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면서 비교적 곤궁하게 살았다. 1855년 자유주의자들이 전국 정부의 통치권을 차지함에 따라 그는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후아레스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돌아와 법무장관이자 공공교육장관으로서 새 정부에 참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후아레스가 지지한 3가지 주요개혁안을 실행했다.
법무장관으로서 그는 성직자 및 군대의 특별재판소를 폐지하는 자신의 이름을 딴 후아레스 법을 제정했다. 그는 사법의 평등이 사회의 평등을 진작하는 데 이바지하리라고 생각했다. 1856년 6월 정부는 당시 재무장관의 이름을 딴 레르도법을 공포했다. 레르도 법은 교회 재산을 팔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그 재산을 강제로 몰수할 수 있는 조항은 없었다. 대토지소유를 무너뜨림으로써 정부는 많은 멕시코인이 재산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강력하고 안정된 멕시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간계급이 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개혁은 1857년 2월 자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라 레포르마). 같은 해 이그나시오 코몬포르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새 의회는 후아레스를 대법원장에 선출했다. 헌법에 의해 후아레스는 사실상의 멕시코 부통령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 대법원장 직은 그의 이후 경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자리였다.
왜냐하면 1858년 1월 보수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코몬포르트를 축출했을 때 후아레스는 대통령직을 계승할 합법적 자격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멕시코 시 주변지역을 장악할 군대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동부의 항구도시 베라크루스로 퇴각했다. 베라크루스에서 후아레스는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쳤다. 그는 정부를 구성해야 했고 투쟁·밀고·타파 등을 통해 그 정부를 유지해야 했다. 또한 헌법을 실시해야 했고, 군대를 유지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을 패배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력과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을 만큼 끈질기고 자립적인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정부의 주인임을 입증했다. 성직자들이 합법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후아레스는 교회의 권력을 제한하는 몇 개의 법률을 제정했다. 그는 실제로 종교의식과 교육에 사용되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교회 재산을 국유화했다.
성직권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교회에 소속된 공동묘지를 국유화했으며 출생신고와 결혼을 민간기관에서 하도록 했다. 마침내 후아레스 정부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고, 모든 시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대통령 재임
1860년 후반경 보수주의자들의 위세가 꺾이자 후아레스는 1861년 1월 멕시코 시로 돌아와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는데, 반대세력은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새 의회는 대통령을 불신했으며, 국고는 사실상 비어 있었다. 국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2년 동안 모든 외채에 대한 지불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1861. 7). 자국의 투자금을 보호하기 위해서 영국·스페인·프랑스는 이 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1862년 1월 베라크루스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영국과 스페인은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를 정복해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大公)을 꼭두각시로 앉혀놓고 멕시코를 통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1862년 5월 5일 푸에블라에서 크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증원군을 보내 멕시코 시를 점령했고(1863. 6), 뒤이어 막시밀리안은 정부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다시 멕시코 시를 떠나야 했던 후아레스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있는 시우다드후아레스에서 오랜 퇴각생활을 끝냄으로써 자신의 정부와 함께 살아남았다. 1867년초 계속된 멕시코의 저항, 미국의 압력, 프랑스 내의 비판여론 등으로 나폴레옹은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직후 멕시코군은 막시밀리안을 붙잡아 처형했다.
후아레스는 멕시코로 돌아온 직후인 1867년 8월 전국선거와 함께 의회가 5개의 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공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경력에서 가장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여론은 후아레스가 대통령 재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헌법 개정에는 후아레스에게 공감을 느끼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멕시코 국민들이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제안한 개정안은 의회가 단독적으로 제정한 개정안을 위헌으로 보았고 행정력을 강화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후아레스는 재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행정부는 개정안에 의해 실시된 이 투표를 집계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신임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병과 개인적인 불행(1870년 10월 후아레스는 뇌졸증을 앓았고 3개월 뒤에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871년 다시 입후보하기로 결심했다.
격렬한 선거운동으로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많은 멕시코 국민들은 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그에 대항해 무기를 잡았다. 후아레스는 평화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여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보냈으며, 1872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후아레스에 대한 평가
후아레스의 정치적 부상은 그의 자유주의 사상을 영구적인 현실정치로 변화시키고, 인디언이라는 자신의 배경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극복하기 위한 계속적인 투쟁과정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멕시코인은 자신들의 인디언 혈통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의 평가는 후아레스의 비범한 능력과 업적을 강조하고 강화시켰다. 그가 시행한 국내의 개혁은 멕시코를 신식민주의의 가장 악명 높은 유물로부터 해방시켰고 프랑스에 대항한 그의 지도력은 후아레스를 멕시코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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