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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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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416 |
국적 | 중국 |
요약
도안의 본무의 뜻을 계승하여 <법성론>을 짓고, 열반상주의 뜻을 널리 폈으며, <명보응론>·<삼보론> 등을 편찬하여 인과응보설·삼세윤회사상을 알려 후세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어린시절 유교와 도교를 배워 널리 6경에 통달한 혜원은 ‘반야성공’의 학문을 연구하여 나이 24세에 <반야경> 강의를 열었다.
381년 루산 산에 올라가 동림사에서 죽을 때까지 30여 년을 머물렀다. 제자법정·법령 등을 외국에 파견하여 경을 가져오게 했으며, 승가제바를 맞이하여 <아미담심론>·<삼법도론> 등을 번역했다. 또 불타발타라를 초청하여 <달마다라선경>을 번역했고, 담마류지를 초청하여 불약다라가 번역한 <십송률>의 미완성부분을 완역했다. 혜원은 영혼불멸성을 독실하게 믿고 염불삼매를 제창했다.
속성은 가씨(賈氏). 옌먼[雁門] 누번 사람이다. 어린시절 유교와 도교를 배워 널리 6경에 통달했으며 특히 노장에 뛰어났다. 21세 때 동생 혜지와 함께 도안을 찾아 스승으로 모셨다.
〈반야경 般若經〉의 강의를 들은 후 '유교와 도교 등의 여러 가르침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했다. '반야성공'의 학문을 연구하여 나이 24세에 〈반야경〉 강의를 열었는데,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반야학을 장자학설과 비교하여 가르쳤다. 381년 루산 산[廬山]에 올라가 동림사에서 죽을 때까지 줄곧 30여 년을 머물렀다. 혜원은 도안의 본무의 뜻을 계승하여 〈법성론 法性論〉을 짓고, 열반상주의 뜻을 널리 폈으며, 〈명보응론 明報應論〉·〈삼보론 三報論〉 등을 편찬하여 인과응보설·삼세윤회사상을 알려 후세 사람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원흥 연간에 환현이 '무수한 사문'에게 명을 내려 사문도 왕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이에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사문은 왕자를 예경하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지어 "가사는 조정과 종묘의 복장이 아니니, 발우가 어찌 조정의 그릇이겠는가? 사문은 세속 밖의 사람이니 왕자를 예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불교가 '황제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에 협조하는 것'이 왕자에게도 이로움이 된다는 것은 그도 인정했다.
제자 법정·법령 등을 외국에 파견하여 경을 가져오게 했으며, 승가제바를 맞이하여 〈아비담심론 阿毗曇心論〉·〈삼법도론 三法度論〉 등을 번역했다. 또 불타발타라를 초청하여 〈달마다라선경 達磨多羅禪經〉을 번역했고, 담마류지를 초청하여 불약다라가 번역한 〈십송률 十誦律〉의 미완성부분을 완역했다. 혜원은 또 구마라집에게 교의를 자문했는데, 그 문답을 모아 후인들이 〈대승대의장 大乘大義章〉을 만들었다. 혜원은 영혼불멸설을 독실하게 믿고 염불삼매를 제창했다.
402년 유유민 등 123명과 함께 아미타불상 앞에서 함께 서방미타정토에 가기를 기원했다. 동림사에서 백련사라는 결사를 만들었으며, 정토종의 초조로 존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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