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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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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허리에 둘러 매는 띠.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한 이후 어떠한 형태이든 허리띠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선사시대나 고대에 사용된 유기물로 된 허리띠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허리띠를 장식하거나 결합시키기 위한 금속제 부품들은 많이 남아 있다. 띠고리에는 타원형, 또는 직4각형으로 구부린 형태로서 긴 걸쇠를 고정하여 띠의 다른쪽에 뚫린 구멍에 찔러넣는 교구(鉸具)와, 안쪽 면에 있는 단추 모양의 돌기를 띠의 한쪽에 고정시키고 반대편의 구부러진 고리를 띠의 다른 쪽에 뚫린 구멍에 찔러넣는 대구(帶鉤)의 2종류가 있다.

평양특별시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교구는 누금세공(鏤金細工)과 감옥기법(嵌玉技法)이 결합된 화려한 유물로서 낙랑의 대표적인 교구이다.

낙랑유적에서는 이외에도 금형대구(琴形帶鉤)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대구는 남쪽의 창원 다호리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원삼국시대(BC 1~AD 3세기)에 접어들면 호랑이나 말 등의 짐승을 묘사한 대구가 출토되었는데 출토지는 영천 어은동유적, 대구 비산동유적, 김해 대성동유적, 천안 청당동유적 등이다. 특히 마형대구(馬形帶鉤)는 삼국시대 대형 고분에서도 나왔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무덤에서는 금속으로 장식한 화려한 허리띠가 피장자의 허리에 착용된 채, 또는 부장된 채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허리띠는 과대(銙帶)라고 불린다. 과대는 관(冠)·목걸이·귀걸이·팔찌·반지·신발 등의 다른 장신구들과 함께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을 반영하는 유물이다. 삼국시대 과대는 중국이나 북방유목민족들에서 유래되어 삼국 고유의 형태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유기질의 띠에 금속제 띠꾸미개[珞板]를 고정시키고 그 아래에 수하부(垂下部), 다시 그 아래에 요패(腰佩) 또는 패식(佩飾)을 늘어뜨린 형태로서 띠의 한쪽 끝에는 교구가, 다른쪽 끝에는 대선금구(帶先金具)가 달려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띠꾸미개에는 용무늬[龍紋]나 삼엽무늬[三葉紋]를 투조하고 때로는 달개[瓔珞]를 매달기도 한다. 고구려의 유물로는 완전한 형태를 볼 수 없고 백제의 것으로는 무령왕릉출토품이 유명하다. 신라의 최고지배자들의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는 금·금동·은제의 화려한 과대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가야고분에서도 신라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과대가 자주 출토되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돌을 깎아 만든 장식을 띠에 결합한 형태의 허리띠가 사용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과대가 신분에 따라 구분되어 제도화되었는데, 따라서 그 종류도 옥대(玉帶)·서대(犀帶)·금대·은대·각대(角帶) 등 다양해졌다. 조선시대의 과대는 고려시대와 비슷하여 조복·제복·상복에 옥대·서대·금대·은대 등을, 문무백관의 예복에 각대를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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