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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피카소 주변의 친구들을 흩어지게 했다. 아폴리네르와 브라크를 비롯해 여러 동료들이 전선으로 떠났고 스페인 동료들은 대부분 중립국인 고국으로 돌아갔다. 피카소는 프랑스에 남았고 1916년에 작곡가 에리크 사티와 가까워지면서 전쟁기간 내내 적극적으로 활동한 새로운 전위 모임에 끼게 되었다.
카페 로통드에서 자주 만난 이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자칭 대표는 젊은 시인 장 콕토였다. 장 콕토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공연하여 서커스 촌극을 주제로 한 무용극 〈익살 광대의 촌극〉을 전쟁중에 무대에 올리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마천루나 비행기 같은 20세기의 새로운 이미지들을 도입한 이 작품의 음악을 사티에게 맡겼고 무대장식과 의상은 피카소에게 맡겼다.
1917년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여행을 싫어했던 피카소였으나 콕토와 로마로 가는 데 동의했고 그곳에서 디아길레프와 이 무용극의 안무를 맡은 레오니드 마신을 만났다. 바로 이때 무용수들 가운데서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올가 코흘로바를 만났다. 1917년 5월 이 무용극은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프랑스 문화의 결속을 위태롭게 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혹평을 받았다. 악보에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와 타자 치는 소리를 삽입한 사티는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것 같다. 반면에 사실주의풍의 무대막과 파격적·종합적인 입체파풍의 의상을 대조시킨 피카소는 관객의 반감을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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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피카소와 익살 광대의 촌극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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