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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2. 3. 31(구력 3. 19), 러시아 노브고로트 지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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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9. 8. 19, 이탈리아 베네치아 |
국적 | 러시아 |
요약 러시아의 예술 진흥에 크게 공헌한 인물.
음악·회화·연극과 같은 각기 다른 예술 형태의 이상과 춤의 이상을 결합시켜 발레를 부흥시켰다.
1906년부터 파리에 살았으며 1909년 발레 뤼스를 창단했다. 이후 발레 뤼스를 이끌고 유럽·미국을 순회했고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명작 〈불새 The Firebird〉(1910)·〈페트루슈카 Petrushka〉(1911)·〈봄의 제전 The Rite of Spring〉(1913)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러시아군 소장과 귀족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다.
어머니로부터 꿈꾸는 듯한 큰 눈을 물려받았으며 개인적으로나 예술적인 면에서의 호사스러운 취미도 물려받은 듯하다. 그는 자신이 완전한 쾌락주의 철학을 따른다고 여러 차례 밝히곤 했다. 계모 헬렌 발레리아노브나 파나예바에게서는 규율감과 지배 본능을 물려받았으며, 어린시절 그의 예술적 감성은 그녀가 음악과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덕분에 발전했다. 학생시절에 피아노 교습을 받고 청중들 앞에서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1890년부터 사회과학·음악·회화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는 그가 한평생 주도한 여러 지성적인 모임 가운데 첫번째 모임이었다. 당시의 친구 가운데 화가 알렉산더 베노이스, 레온 바크스트는 후에 디아길레프의 발레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와 발레의 첫 만남은 엉뚱하게도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1890년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Sleeping Beauty〉를 별 감흥없이 보았던 것이다(나중에 이 작품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둠).
1893년 첫번째 해외여행에 나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돌다가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와 오페라 작곡가 샤를 구노, 주세페 베르디를 만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예술인들을 찾아다니며 자극을 받았다. 1896년 법과대학을 졸업했으나 그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청중들 앞에서 발표된 그의 성악곡이 신통하지 않자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가 작곡가가 되는 데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후원자를 만나 샬리아핀이 등장하는 오페라 제작을 위한 혁신적인 무대장치를 제안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는 확신을 갖지 못했으나 로마 시대의 매세나 같은 위대한 예술 후원자의 역할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했다. 오페라·발레·문예행사 같은 공연사업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으므로 사적인 수입 없이 이 일을 시작한 그는 많은 장애에 부딪혔다. 더구나 19세기 러시아에서 그의 동성연애는 활동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성적인 매력과 대담함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1899년 그는 〈예술세계 Mir Iskusstva〉(1904년까지 발간)를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음으로써 이러한 국제적인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 잡지의 성격은 런던에서 그래픽 미술가 오브리 비어즐리와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생각을 반영하던 〈옐로 북 Yellow Book〉과 비슷했다. 1905년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타우리데 궁에서 역사적인 러시아 예술전을 열었다.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1906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한 것이었다.
바로 파리에서 그는 나중에 프랑스-러시아 예술가동맹이라 불리게 된 조직을 만드는 데 힘썼다. 그는 러시아 예술전을 기획했고 1907년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었으며, 1908년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를 표도르 샬리아핀 주역으로 파리 오페라좌에서 러시아어로 공연했다. 마침내 여러 예술들의 결합 내지 상호침투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할 때가 왔다.
1899년 러시아 황실 극장 감독 세르게이 볼콘스키 대공의 조수로 임명된 디아길레프는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의 영향을 깊게 받아 창의적 활동을 벌이던 무용가 미첼 포킨을 만나게 되었다. 덩컨의 혁신적인 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이상,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디아길레프는 1909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발레 뤼스의 첫 시즌을 시작했다.
무용가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미첼 포킨이 그의 무용단에 속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길레프의 공연물에서는 판에 박힌 안무가 자취를 감추었다. 주로 포킨과 레오니드 마신의 영향 아래 완전히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고 있었던 안무가들의 목표는 마임 혹은 행위의 춤이었다. 낡은 예술 형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선택된 작곡가들은 화가와 안무가들의 환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는 디아길레프의 뛰어난 창조물이었으며, 통합예술의 이상을 타고난 안목을 바탕으로 실현한 것이었다. 디아길레프의 예술은 젊은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발레곡 〈불새〉·〈페트루슈카〉·〈봄의 제전〉의 3편에서 절정에 달했다. 디아길레프가 기획한 발레 가운데 가장 뛰어난 〈페트루슈카〉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주장에 따라 자신이 종래 작업해오던 진부한 개념의 피아노 협주곡을 마임 형식의 발레곡으로 바꾸어 연예물에 나오는 꼭두각시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실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디아길레프가 함께 일하는 제작진들에게 매우 큰 심리적 영향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관현악곡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이 파리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자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 음악의 불협화음과 거친 리듬은 세련된 관객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관현악단 가까이에 있는 무용수들도 음악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대 곁의 의자 위에 서서 고함을 치며 몸짓으로 리듬을 지시한 안무자 니진스키 덕분에 무용수들은 공연을 계속했다.
디아길레프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 끝내 되돌아가지 않았고, 파리에서 특히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와 일했다.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고 유럽·미국·남아메리카를 순회하였으며 그의 발레 시즌은 1909~29년 동안 계속되었다. 후기의 시즌에는 프랑스·이탈리아·영국·미국 출신의 진보적인 작곡가와 화가들의 작품을 발레에 도입했는데 그의 레퍼토리에 포함된 작곡가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있다.
그는 큰 영향력을 지녔지만 가난했으며,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고독했으며 불만이 많았다.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결코 완벽함을 실현하지 못했으나 늘 개척정신을 지녔다. 그는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는데,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1929년 시즌이 성공적으로 끝날 즈음 건강이 악화되어 베네치아로 휴가를 떠났으나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져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산미켈레의 섬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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