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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8. 3. 8, 글래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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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6. 5. 6, 에든버러 |
국적 | 스코틀랜드, 영국 |
요약 스코틀랜드의 형이상학 철학자, 영향력 있는 교육가.
논리학 분야에 공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813년 스코틀랜드 변호인단의 일원이 되었고, 1816년 법정 판결에 따라 준남작의 지위를 물려받았으며, 1821년 에든버러대학교의 시민사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836년에는 동대학교의 논리학·형이상학 담당 교수직에 선출되었다.
다재다능한 교육가인 해밀턴은 해부학·생리학·문학·신학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문에 자주 글을 싣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쟁의 〈철학 강좌 Cours de philosophie〉에 대한 비평문을 〈무제약의 철학 The Philosophy of the Unconditioned〉이라는 제목으로 〈에든버러 리뷰 Edinburgh Review〉에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오랫동안 교분을 맺기도 했다.
해밀턴 자신이 철학자로 불린 것은 독일 철학자들에 관해 쓴 논문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창적인 사상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비평가들은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을 이마누엘 칸트와 결합하려는 그의 노력을 무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영국 사회에 칸트를 소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논리학사에서 해밀턴이 남긴 업적은 술어양화론이다. 그는 '모든 A는 B이다'의 술어를 양적인 측면에서 변형하여 '모든 A는 모든 B이다'와 '모든 A는 어떤 B이다'의 2개 형태로 만듦으로써 명제 분류의 범위를 확장했다. 교육학의 분야에서 해밀턴은 〈에든버러 리뷰〉에 논문들을 발표하여 1850년 왕립위원회의 발족과 개혁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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