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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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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는 격변기를 맞이했다. 당나라의 성립과 그에 따른 대외 팽창 정책은 삼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외세에 힘입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고구려 땅에서는 뒷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대진국)가 건국되었다.

발해는 많은 제도를 고구려에서 취했으므로 의학분야도 고구려와 유사할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는 676년 당나라와의 전쟁 이후 200여 년 간 외세 침입이 없었기 때문에 농업·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고, 그에 따라 보건의료제도가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구조상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의 건강보다는 지배계급의 건강을 중심으로 한 의료제도가 바탕을 이루었다. 삼국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발전했던 보건의료제도를 참작하여 보다 정비된 보건의료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당나라의 여러 직제를 수용했다. 대표적인 의료기관으로는 약전(藥典)이 있었는데 이는 한때 보명사(保命司)라고 불렸고, 의약기술자 이외에 행정업무를 보는 직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약무만이 아니라 보건의료사업 전반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전 이외에 의료사업을 담당한 의사들의 관명으로는 국의·공봉의사·내공봉의사·의관·의박사 등이 있었다. 특히 의박사는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기관의 교수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가적 정규 의사양성사업의 첫 기록이 692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신라의 의사양성사업은 그당시의 당나라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중국·일본과 달리 침의사와 의사를 구별하지 않은 것, 교재의 차이(〈난경〉과 〈침경〉의 사용), 기초이론적인 교재의 사용 등에서 독자성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보건의료제도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상당히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자선의료사업을 들 수 있는데, 상설기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방별로 자선에 필요한 물품을 비치해둔 것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질병관과 임상의학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는 고대의 신비적·미신적 질병관에서 외부의 힘이 작용하는 외인론이 대두된 점과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을 여러 병으로 분류하여 처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임상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보다 더 많은 약물들이 치료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곧 본초학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미 〈본초경〉 등 본초서가 수입되었고, 중국·일본으로 신라의 여러 약재가 수출되고 있었다. 특히 인삼·우황은 국제간의 증품으로 〈삼국사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의 번성으로 승의들이 많은 활약을 했지만, 주술적인 형태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로 보건의료상 오류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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