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19세기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오직 중국과의 사대교린으로 일관했던 조선은 서양열강과 일본에 의하여 문호개방에 대한 압력을 받다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개방되었다. 그결과 각국의 공관과 종교건축물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건축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건축양식이 도입되었다. 19세기말에 도입된 새로운 건축양식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도입된 양식, 서양열강제국에 의하여 도입된 전통적인 서양식, 이를 절충한 의양풍이 있다. 특히 이때는 민간양옥도 다수 건립되어 20세기 한옥개량운동 등 여러 측면에 영향을 끼쳤다.
1890년 건립되어 현존하는 영국공사관은 벽돌조 2층집으로 박공부분과 1, 2층의 베란다, 아케이드 등이 있는 정교한 건축이다. 종교건축으로는 1898년 착공·준공된 정동교회 등이 있다. 이처럼 새로운 건축양식은 대부분 벽돌이나 석조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고전주의·낭만주의·절충주의적인 양식으로 르네상스·고딕 양식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19세기에 서양식 건축의 도입에 있어 그 특징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목수들이 양식건축의 공사를 전담할 수 없어 대부분 중국인 노무자들을 채용했다는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20세기초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더불어 스팀 난방 등의 새로운 설비체계가 도입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서양식 건물의 건립이 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종교·주거·외교 계통 건물 외에 각종 상점·병원·호텔 등이 건립되었다. 예를 들면 천주교 원효로성당(1902), 벨기에 영사(1903~06) 등이 있다. 특히 20세기의 건축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평양 장로교회, 화산 천주교회 등과 같은 한양 절충양식 건물의 출현이다.
1930년대에는 합리주의적인 근대건물들이 출현했는데 1929년에 준공된 경성상공장려관을 시작으로 신동아백화점(1931)·조선신문사(1933)·삼중정백화점(1933)·조선일보사(1935) 등이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한국인 건축가들이 전문적인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건축계에 대두하여 많은 건축물들을 설계하는 한편, 8·15해방 이후 세대들에게 대를 물려주게 되었다. 이때 건립된 것으로 박길용의 경성제국대학본관(1931)·화신백화점(1935~37), 박동진의 보성전문학교 본관(1934) 및 도서관(1937), 강윤의 태화기독교사회관 등이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해방을 맞았으나 곧 6·25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1959년까지는 전쟁 복구에 전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명보극장(1957, 김중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사(1957, 김희춘), 국립중앙관상대(1959, 정인국), 동국대학교 본관(1959, 송민구), 정신여자고등학교 과학관(1958, 김정수), 혜화동성당(1958, 이희태) 등 국제주의적 경향을 띤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1960년대에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경제개발과 더불어 건설수요가 급증했다. 이때의 주요건축으로는 서울시민회관(1961, 이천승), 프랑스 대사관(1962, 김중업), 워커힐 본관(1962, 김희춘), 명동성모병원(1963, 김정수), 한양 컨트리 클럽(1964, 이광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회관(1964, 강명구), 자유 센터(1964, 김수근), 복자기념성당(1967, 이희태) 등이 있다. 이 시기를 윤일주는 '실험과 논재의 10년'이라고 정의했다. 1970, 1980년대의 20여 년 간은 그간의 국제주의적 경향을 벗어나 건축가들의 개성이 표출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건축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건축양식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