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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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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는 사회적인 지배세력의 기반을 점점 확대시켜가는 방향에서 진전되어 왔는데,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문화와 접촉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서양의 새로운 문화가 접근해왔고, 이에 대하여 북학파들은 이미 널리 통상을 하여 신문명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인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일본과 통상을 하게 되면서 개화정책은 크게 진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화도조약이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강요에 의한 불평등조약이었던 데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개항과 더불어 밖으로부터의 식민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화기 이후 한국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서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개혁을 촉진함과 동시에, 밖으로부터의 압력을 배제하고 대외적인 자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게 된 셈이다.

개항 후에 조정에서는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紳士遊覽團)을 파견하여 각종 시설을 시찰하게 하고, 또 영선사(領選使)로 하여금 양반 출신 자제를 거느리고 청에 가서 신식무기의 제조법을 배우게 했다. 이어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고, 통리기무아문 아래 12사(司)를 두는 행정기구 개혁을 실시했다.

이러한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유교를 지키고 외국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을 펼쳤다. 그리고 그같은 배타적인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임오군란(1882)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군이 출동하여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라 하여 납치해가고,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제국과의 통상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일본을 모범으로 하는 개혁을 목표로 일어난 정변이 김옥균(金玉均) 등에 의한 갑신정변(1884)이다.

갑신정변은 젊은 양반 출신 개화파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으로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믿고 행한 이 개혁은 결국 청군의 출동으로 인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청·일 양군은 모두 철수했지만, 그 사이에 러시아의 세력이 침투해오고, 이에 대항하여 영국군의 거문도점령사건이 벌어져, 조선은 마치 열강의 세력각축장이 된 듯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영세중립국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개혁론자들이 외국세력과 결탁한 데 대하여 외국세력의 배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은 개혁을 거부했다.

이런 속에서 자주적인 개혁을 수행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1894).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의 주장 아래 봉기하여 신분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일본의 침략을 배격할 것을 주장했다. 또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중심의 내각에서도 갑오개혁을 단행하여(1894) 신분제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했다. 비록 경제면 등에서는 일본의 영향이 있었으나 사회적인 개혁은 정부 자신에 의한 개혁이었다.

이러한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청과 일본의 군대가 출동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간섭이 심해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키자, 격분한 유학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이에 대항했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군에 포위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아관파천, 1896),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겼다.

이런 상황속에서 전개된 것이 독립협회의 활동이다. 서재필에 의하여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는 첫째, 외국세력으로부터의 자주독립운동이었고, 둘째, 일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하게 하고 국회를 개설하려는 민권운동이었고, 셋째, 교육·상공업·국방력을 강화하려는 자강운동이었다. 말하자면 개혁과 자주독립의 2가지 기본적인 과제를 올바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제시한 것이다.

고종은 이에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기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는 등의 새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경쟁 속에 말려들었는데, 러일전쟁(1904)에서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다른 경쟁상대 없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길로 치닫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승인 없이 불법적으로 체결·처리된 을사조약(1905)에 의하여 외교권을 발탁당했으며 이어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일제에게 합병되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반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국왕의 왕권 옹호를 위한 반항이 있었는데, 을사조약이 불법이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호소한 헤이그 밀사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양반관료들의 항거로는 민영환(閔泳煥) 등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또는 상소를 올려 항일을 호소하기도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일본의 무력 아래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반항운동은 의병운동이었다. 을미사변에서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은 을사조약 뒤에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 등의 활동이 있었고, 군대가 해산된 뒤에는 군인들이 이에 합류하여 군대다운 조직과 무기를 갖고 반항했다.

전국의 의병 약 1만 명은 연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희생을 내고 점차 약화되다가 합병 뒤에는 해외로 가서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항일전을 계속했다. 또 독립협회 이후 보안회(保安會)·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등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반항했다. 또 〈독립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 여러 신문을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항쟁을 했다.

한편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으로 각종 학교를 세워 교육열을 북돋웠다. 최초의 사립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1883) 이래 배재학당(培材學堂) 등 많은 사립학교가 서울과 지방에 세워졌으며, 노동자나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야학도 많이 세워졌다. 종교계에서도 기독교가 민족사상과 자유주의를 고취하며 크게 환영을 받았고, 대종교(大倧敎)가 단군신앙을 내세워 민족정신을 앙양했다.

한편 주시경(周時經) 등이 국어연구에,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 등이 국사연구에 힘써 민족정신의 앙양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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