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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프라고나르

다른 표기 언어 Jean-Honoré Frago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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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32년 4월 5일, 프랑스 그라스
사망 1806년 8월 22일,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받는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거장으로 주요 작품은 <그네>. 초기에는 변호사의 도제였으나 곧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랑수아 부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로마 바로크 시기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공부한 후 살롱전에 데뷔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그림에서는 인물보다도 환상적인 의상과 장식적인 표현이 강조되었다. 초기의 로코코 회화에서 후기에는 신고전주의적인 주제로 방향이 바뀌었으며, 프랑스 혁명 후에는 점차 잊혀졌지만 후대에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시적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8세기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이다.

ⓒ Jean-Honoré Fragonard/wikipedia | Public Domain

〈그네 The Swing〉(1766경)와 같이 섬세하고 쾌락주의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네(The Swing)

1767년 작품

ⓒ Jean-Honoré Fragonard/wikipedia | Public Domain

아버지는 잡화상 점원이었으며 가족이 1738년 파리로 이사했다. 1747년 변호사의 도제로 들어갔는데 그 변호사가 그림에 대한 프라고나르의 의욕을 알아채고 그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제안했다. 주위의 설득으로 프랑수아 부셰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며(1748경), 1752년 기초 과정이 끝나자 그에게 파리에서 루이 15세의 궁정화가인 샤를 방 로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따기 위해 로마상에 응모하도록 추천했다.

로마상을 받은 프라고나르는 1756년 9월 17일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로 떠났다. 아카데미에서 그는 주로 로마 바로크 시기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많은 그림을 모사했으며, 친구이자 프랑스 화가인 위베르 로베르와 함께 로마 근교의 풍경을 스케치했다. 1759년 7월 장학 기간이 끝났으나 아카데미의 허락을 받아 계속 그곳에 머무르다가 11월 말엽 부유한 미술애호가인 아베 드 생농을 알게 되었고 그뒤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760년초 생농은 프라고나르와 로베르를 데리고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했는데, 이 여행중에 두 미술가는 이탈리아의 회화 및 고미술품들을 연구했으며 지방의 경치를 주제로 수백 점을 스케치했다.

1761년 프라고나르는 파리로 돌아온 뒤 몇 점의 풍경화와 대작 〈칼리로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코레소스 Coresus Sacrifices Himself to Save Callirhoe〉를 살롱에 전시했는데 누군가 이 대작을 사들여 루이 15세에게 바쳤다.

칼리로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코레소스(Coresus Sacrifices Himself to Save Callirhoe)

1765년 작품

ⓒ Jean-Honoré Fragonard/wikipedia | Public Domain

그결과 그는 이 작품과 한 쌍을 이룰 수 있는 또다른 작품 제작을 의뢰받고 루브르 궁에 작업실을 제공받았으며,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767년 이후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거의 중단하고 종종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인 야코프 반 로이스달의 양식을 모방한 풍경화(〈소떼의 귀환 Return of the Herd〉, 우스터)와 초상화 및 부셰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그보다는 좀더 솜씨 있게 그린 장식적이고 반(半)관능적인 들놀이 장면(〈그네 The Swing〉)에 집중했다.

1760~67년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유연하고 활기찬 화풍의 초상 연작(〈노인의 두상 Head of an Old Man〉)을 보면, 그가 렘브란트와 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란스 할스 및 베네치아의 동시대 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뒤이어 이와 비슷한 양식으로 그린 일련의 초상화(1765경~72)에서 모델은 실제 인물이었지만 얼굴 표정보다는 그들의 환상적인 의상이 강조되었다.

1769년 그라스 태생의 마리안 제라르와 결혼하고 그뒤 곧 상류사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1770년에 바리 부인의 부탁을 받아 그녀의 새로 지은 루브시엔의 별장을 4점의 대형 그림(〈사랑의 발전 Progress of Love〉, 뉴욕 프릭 컬렉션)으로 장식했으며, 1772년에는 유명한 여배우 마들렌 기마르에게 유사한 주문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둘 다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루브시엔의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신고전주의적인 건물에 비해 그림들이 지나치게 로코코 양식을 띠고 있어거절된 것으로 여겨진다.

1772~73년 네덜란드 지방을 여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렘브란트와 할스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그의 후기 초상화들에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1773~74년 2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번에는 채색화보다 소묘로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리는 데 전념했다. 빈과 프라하, 독일을 거쳐 파리로 돌아오는 중에 처제인 14세의 마르게리트가 그들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프라고나르는 그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결과 그는 새로운 주제로 관심을 돌려서 장 자크 루소의 도덕철학이나 낭만적인 소설에서 착안한 가정적인 장면들(〈행복한 가족 The Happy Family〉), 또는 종종 그의 아들 에바리스트(1780 출생)를 주인공으로 해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장면들(〈여교사 The Schoolmistress〉)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프라고나르는 결국 신고전주의적인 주제로 방향을 바꾸어 보다 경직된 신고전주의 양식(〈사랑의 샘 The Fountain of Love〉)을 발전시켰는데, 이런 점은 그의 후기 작품들, 특히 마르게리트 제라르와 함께 그린 풍속화들(〈사랑스러운 아이 The Beloved Child〉)에 점점 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의 미술은 혁명 전의 시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서 혁명기간 동안 그는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후원자들도 잃었다. 처음에 그는 그라스에서 칩거하다가 1791년 다시 파리로 돌아가 그곳에서 중요한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도움으로 박물관을 관리하는 직위를 얻었지만 1797년 이 직위마저 박탈당했다. 그후 그는 여생을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서 살았다. 1806년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은 1850년이 훨씬 지나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프라고나르는 와토와 함께 18세기의 단조로운 프랑스 미술계에서 중요한 시적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놀랄 만큼 활동적인 미술가였던 그는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그중 수백 점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및 35점의 에칭 판화를 제작했다. 주로 루벤스의 작품에 기초를 둔 그의 양식은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꽉 차거나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았으며, 민첩하고 활기차고 유연했다. 활동기간의 상당 부분이 신고전주의 시기에 속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까지 계속 로코코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 중 단지 5점만이 연대가 적혀 있지만, 나머지 작품의 연대도 판화나 문서 등의 다른 자료들을 기초로 정확하게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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