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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Desire〉지에 따르면 이 섬은 1592년 영국인 항해가 존 데이비스가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서 확인되는 것은 1600년경 네덜란드인 세발다 데 웨르트에 의한 발견이다.
최초의 주거지는 1764년 프랑스 항해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이스트포클랜드 섬에 정착하면서 이루어졌다. 1765년 영국인이 웨스트포클랜드 섬에 처음 정착했으나 1767년에 이미 프랑스의 정착지를 사들였던 스페인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1770).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자 1771년 웨스트포클랜드 섬의 영국인 전초기지가 복구되었으나, 1774년 영국은 영토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경제적인 이유로 섬에서 철수했다.
스페인은 1811년까지 이스트포클랜드 섬(당시의 이름은 솔레다드 섬)에 정착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영제국).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는 1820년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1831년 미국 군함 USS 렉싱턴호는 아르헨티나가 그 지역 내에서 물범류를 사냥하던 미국의 배 3척을 불법 포획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트포클랜드 섬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정착지를 파괴했다.
1833년초 영국군은 섬에 잔류해 있던 몇 안 되는 아르헨티나 장교들을 추방했다. 1841년 포클랜드 제도에는 영국인 민간인 부총독이 임명되었고, 1885년에는 1,800명 정도로 이루어진 영국인 지역사회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92년에 포클랜드는 식민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정기적으로 영국의 섬 점령에 항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토권 문제는 1964년 국제연합(UN) 식민지 해방위원회가 포클랜드 제도의 지리적 위치를 문제삼으면서 UN으로까지 넘어갔다.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신대륙 분할기준이 되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에 의해 수정된 1493년의 교황칙서, 스페인을 계승했다는 점, 포클랜드 제도가 남아메리카 대륙에 가깝다는 점, 식민지 상황을 종식시켜야 하는 필요성 등을 근거로 삼았다.
영국은 1833년 이래 '개방적이고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소유·점유·행정'과 UN 헌장에 명시된 자결원칙 적용 등을 근거로 자국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통치는 식민지 상황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클랜드인의 소망에 반대되는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어낼 뿐이라고 했다. 1965년 UN 총회는 이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소환하여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형태의 분쟁들은 1982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직후인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군사정부는 곧 포클랜드를 침공했다. 이 침공으로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제도의 수도인 스탠리에서 제도를 강제로 재점령한 영국군에게 항복함으로써 10주 만에 끝났다. 영국은 섬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켰고, 군사제한지역과 어획금지구역을 상당히 먼 거리까지 확대했다. 인구 2,56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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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포클랜드 제도의 역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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