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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7. 9. 15, 미국 오하이오 신시내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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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0. 3. 8, 워싱턴 D. C. |
국적 | 미국 |
요약
태프트는 미국의 제27대 대통령과 제10대 연방대법원장을 역임하여 미국 역사상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의 육군장관 재임시에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맺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승인했다.
1890~92년 연방 법무차관, 1892~1900년 연방상소법원 판사로 일했다. 190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제2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내각에 자유주의 인사를 단 한 사람도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공화당 내부에서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사이의 불화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행정부는 4년 동안 정직한 정부라는 명분을 세워나갔다. 1912년 재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미국 대법원장에 임명되었고, '마이어스 대 미국 판결‘(1926)에서 연방관료를 해임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리를 옹호한 의견을 내놓았다.
아버지는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밑에서 육군장관과 법무장관(1876~77)을 지낸 앨폰스 태프트이다.
1878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1880년 오하이오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했고 1887년까지 지방 행정관청에서 일하다가 같은 해 오하이오 상급법원 판사가 되었다. 1890~92년 연방 법무차관을 지냈고 1892~1900년 연방상소법원 제6순회재판지구의 판사로 일했다. 노사분규와 관련된 소송사건에서 간접적인 불매운동의 불법성과, 중지명령권을 통해 폭력을 제한하는 법안의 의무를 강조한 그의 견해는 많은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노동조합의 법적 권리를 지지했으며 독점금지법을 실시하기 위해 중지명령권을 확대하기도 했다. 1900년 그는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설득을 받아들여 판사직을 그만두고 '제2필리핀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 위원회는 미국-스페인 전쟁(1898)이 끝난 뒤 필리핀에 민간정부를 조직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군정종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1901년 최초의 민간인 총독이 된 그는 필리핀의 경제발전에 주력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필리핀 국민들의 큰 인기를 얻었다.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육군장관으로 지명되었을 때도 그는 계속 필리핀에 관한 업무를 감독할 수 있다는 조건부로 필리핀을 떠났다.
1908년 루스벨트는 재선에 나서기를 거절하면서 태프트를 지지했고 태프트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어 민주당 후보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의 투표에서 쉽게 승리했다.
태프트의 정치적 통찰력 부족은 공화당 내부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사이의 점차 커져가는 불화에 무관심한 데서 곧 드러났다. 사실상 이 불화는 그가 내각에 자유주의 인사를 단 한 사람도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조장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정부는 4년 동안 정직한 정부라는 명분을 세워나갔다. 그는 1년 단위 예산의 편성을 추진했고 연방 우편저금제도를 확립했으며 자연자원의 보존을 촉구했고 독점금지법을 적극 시행했다.
집권 마지막 달에는 점차 급진주의를 표방하는 루스벨트가 그를 고립시키면서 둘 사이에 불화가 커져갔다. 1912년 선거에서 태프트는 진보당 후보로 출마한 루스벨트에 대항해 어쩔 수 없이 출마했으나 선거결과는 이들의 불화를 이용한 민주당 후보 우드로 윌슨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태프트는 예일대학교 법학교수와 '전국전시노동이사회'(1918)에서 일했다.
그는 또한 '평화실시연맹'을 발기했고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강력히 지지했다. 1921년에는 미국 대법원장이 됨으로써 자신의 경력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재판제도 운용이 시대에 몹시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해 사법기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조치를 신속히 강구했고 1925년의 '판사법 제정'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법으로 대법원은 상고 사건 접수에서 더 많은 재량권을 가지게 되었고 국가적 중요성을 띤 사건에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프트의 견해를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다고 보지만 사실 태프트의 견해는 중도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법원의 중지명령권 사용을 승인했지만 이 중지명령권이 노동자의 조직과 파업의 권리를 막으면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권리 사용을 제한했다. '마이어스 대 미국 판결(Myers v. U. S. :1926)에서 연방관료를 해임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리를 옹호한 의견을 내놓은 것은 헌법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꼽힌다. 태프트는 건강의 악화로 1930년초에 사임하여 1개월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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