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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탁자 중앙에 있는 네트 너머로 공을 쳐서 상대편 탁자에서 튀도록 하고 상대방이 그 공을 받아칠 수 없게 만드는 경기이다. 경기 종류에는 남녀 단식·남녀복식·혼합복식 등이 있다.
탁자의 규격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5m, 2.7m이며, 네트 길이는 1.8m이다. 지름 3.8㎝, 무게 2.5g인 탁구공은 속이 비어 있으며 셀룰로이드나 이와 유사한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다. 탁구채는 평평하고 딱딱한 나무로 만들어지며, 그 위에 스폰지와 한쪽 면에 돌기가 있는 얇은 고무를 붙인 것이다.
11포인트를 먼저 획득하는 선수가 승리한다. 10:10의 상황에서는 연속 2점을 먼저 획득하는 쪽이 이긴다. 서브는 탁자 끝 쪽의 뒤에서 하며, 라켓을 쥐지 않은 손바닥을 펴고 수직으로 공을 던졌다가 공이 떨어지는 순간 친다.
경기용 탁자는 중앙에 있는 네트로 양분된다.
경기방식은, 네트 너머로 공을 쳐서 상대편 탁자의 중간쯤에서 튀도록 하고 상대방이 그 공을 받아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탁구공은 가볍고 속이 텅 비어 있으며 셀룰로이드나 이와 유사한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다. 선수들은 작은 라켓 앞·뒷면을 이용해 공을 친다.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인기를 얻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서 강세를 나타내는데, 대표적인 아시아 국가로는 중국·일본·한국을 들 수 있다.
탁구 장비는 다른 스포츠 장비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저렴한 편이다.
직4각형 경기용 탁자의 규격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5m, 2.7m이며, 경기장 바닥에서 탁자까지의 높이는 76㎝이다. 네트 길이는 1.8m이며 탁자에서 네트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15㎝이다. 탁구공은 속이 비어 있고,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다. 1969년부터는 셀룰로이드 재질에 가까운 플라스틱 소재도 사용하고 있으며 지름 3.8㎝, 무게 2.5g이 규격이다. 라켓 또는 배트라고 하는 탁구채는 평평하고 딱딱한 나무로 만들어지며, 그 위에 스폰지와 한쪽 면에 돌기가 있는 얇은 고무를 차례로 붙인 것이다.
고무의 돌기 부분은 안쪽으로 붙여도 되고 바깥쪽으로 붙여도 된다. 라켓의 양면은 각기 다른 색이어야 한다. 라켓의 크기·무게·모양에는 제한이 없다.
11포인트를 먼저 획득하는 선수 또는 조가 게임을 이기게 된다. 10:10의 상황에서는 연속 2점을 먼저 획득하는 선수 또는 조가 이긴다. 7전 4선승 또는 5전 3선승 처럼 홀수제 선승제로 경기를 한다. 2포인트를 득점할 때마다 리시빙 선수 또는 조가 서비스 선수 또는 조가 되며 게임이 끝날 때까지 이 방식을 계속한다.
양 선수 또는 조가 모두 10포인트를 득점한 경우나 촉진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경우는 예외인데, 이때는 서비스와 리시빙의 순서는 같은 방식이지만 선수들은 1포인트 변동시 순서대로 서비스를 넘겨준다.
서브는 탁자 끝 쪽의 뒤에서 하며, 서브를 하는 선수는 라켓을 쥐지 않은 손바닥을 펴고 수직으로 공을 던졌다가 공이 떨어지는 순간 치게 된다. 이때 먼저 공이 자신의 탁자에 1번 튀었다가 그 반동과 함께 네트를 넘어서 상대방의 탁자 위에서 튈 수 있게 해야 한다.
서브를 할 때 손가락으로 공에 회전을 거는 것은 반칙이다. 그러나 이 규칙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규칙이 생기기 전에는 공을 회전시키는 일이 빈번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이 기술을 잘 구사하는 선수가 상대방이 전혀 받을 수 없는 서브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7년부터 전세계적으로 이 기술은 금지되었다. 탁구채를 쥐는 방법은 셰이크핸드와 펜홀더식 2가지가 있다. 셰이크핸드는 테니스 라켓을 쥐는 방법과 동일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테니스의 경우와는 달리 라켓 끝부분을 쥐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집게손가락이 라켓의 뒷면에 놓이고 엄지손가락은 라켓의 앞면을 향하게 하여 손잡이를 쥐는 방식이다. 중국과 일본 선수들을 포함한 아시아 선수들은 펜홀더식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치 펜을 쥐는 것처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손잡이를 쥐는 형태를 말한다. 펜홀더식을 사용하는 선수는 탁구채의 앞면으로만 공을 쳐낼 수 있다.
탁구 관중이 흥미를 갖는 부분은 선수들이 어떤 전략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이기는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경기를 빠르게 이끈다거나, 경기의 속도를 늦춘다거나, 타구의 방향을 전환시킨다거나, 회전을 다양한 방법으로 구사한다거나, 타구의 거리를 조절한다거나, 상대방 선수가 미처 자세를 갖추기 전에 드롭샷을 구사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경기운영 전략들이다. 한때 방어적 형태의 느린 경기가 주류를 이루었던 때가 있었다. 1936년의 프라하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1득점을 얻는 데 무려 1시간가량이 걸린 일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현재는 게임이 시작된 후 15분까지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 촉진방식(Expedite System)을 적용하게 된다. 이 규칙에 따라, 상대 선수가 서브를 하는 선수의 공을 12번 계속해서 받아 치면, 상대 선수의 득점이 인정된다. 그리고 서브권은 1득점이 날 때마다 교대하게 된다. 경기의 종류에는 남녀 단식·남녀복식·혼합복식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여자 종목 역시 남자 종목 못지 않게 조직화가 잘 되어 있으며,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에 포함된다. 탁구는 일반인들의 오락용 스포츠로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각종 스포츠 클럽, 오락실, 일반 가정 등에서 폭넓게 행해질 뿐만 아니라 기상조건이 좋고 주위가 조용하다면 야외에서도 할 수 있다.
역사
20세기초 영국에서 처음 고안된 경기로 원래는 핑퐁이라고 했다. 탁구(table tennis)라는 이름은 옛 핑퐁 협회가 재결성되었던 1921~22년에 채택되었다. 원래의 협회는 1905년경 해체되었지만 그후에도 탁구는 런던을 제외한 영국의 일부지역에서 계속 행해졌고 1920년대에는 이미 많은 국가로 전파되어 있었다.
1926년 독일·영국·헝가리 대표들이 주도하여 국제탁구연맹(International Table Tennis Federation/ITTF)을 창설했으며, 초대 회원국은 잉글랜드·스웨덴·헝가리·인도·덴마크·독일·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웨일스 등이었다. 1980년대에는 회원국이 110개 이상으로 늘었다.
최초의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1927년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1939년까지 중부 유럽의 선수들이 대회를 휩쓸었다. 이때 헝가리가 남자 단체경기에서 9번 우승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가 2번 우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53년까지 같은 종목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4번 우승했고, 헝가리가 2번 우승했다. 이 두 국가는 우수한 선수도 많이 배출했다.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부문에서 5번 우승한 V. 보르노, 2번 결승전까지 진출한 라슬로 벨로크, 1번 우승하고 2번 결승에 진출했던 M. 소보도슈, 1953년 우승한 페렌츠 시도 등이 모두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 선수들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2번 우승하고 2번 준우승한 보후밀 바나, 세계선수권대회 복식 부문에서 4번 우승한 이반 안드레아디스 등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해냈다. 그밖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리하르트 베르크만 역시 우수한 선수로 꼽히고 있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의 단식 부문에서 4번 우승했는데 그중 2번은 영국에 귀화한 이후 영국 국적으로 우승했다. 여자 단식 부문에서도 중부 유럽의 강세는 두드러졌다. 1934~56년에 16번의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동안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는 각각 8번 우승을 차지했다. 헝가리 출신의 M.메도뇬스키는 1926~31년에 여자 단식 부문에서 연속 우승했다. 역시 헝가리 출신의 기지 포르코슈가 1946~49년에 연속 우승했고, 루마니아의 안젤리카 로제아누는 1950~55년에 6번 우승했다.
1953~54년 대회에서는 아시아 국가의 선수들도 세계 최강의 대열에 끼기 시작했다(→ 올림픽 대회). 그 이후 남자 단체 종목은 일본이나 중국이 거의 우승을 도맡다시피했고 여자 종목에서도 이 두 국가가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 선수로는, 각기 2번이나 세계 정상에 오른 바 있는 오기무라 이치로[荻村伊智朗]와 다나카 도시아키[田中利明]를 들 수 있다. 중국의 선수 가운데에서는 좡쩌둥[莊則棟]이 3번 우승했다.
중국은 1966~69년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가 1971년부터 다시 세계 탁구를 주도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세계 탁구의 흐름을 좌우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북한도 국제적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80년에 최초로 월드 컵 탁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첫 대회에서 중국의 궈야오화[郭曜華]가 우승하면서 1만 2,500달러의 상금을 차지했다(→ 스포츠기록:탁구).
한국의 탁구
탁구가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4년 1월 경성일일신문사 주최의 핑퐁 경기대회가 효시인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청년회(YMCA)가 1928년 2월 YMCA 체육관에서 개최한 제1회 조선탁구대회가 경기사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신규행사였다. 8·15해방 후 1945년 9월 창립된 조선탁구협회가 1947년 9월 대한탁구협회로 개칭했고, 연례행사로 전국선수권대회를 열게 되었다. 같은 해 제1회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에 국제대회사상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뒤 1956년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23회 대회를 시발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해오고 있다.
특히 1973년 3월 59개국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정현숙 선수가 여자단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탁구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북한·일본 등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국제조직인 아시아 탁구연맹이 1973년 해체됨에 따라 한국의 탁구는 아시아 지역에서 한동안 고립되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1980년 8월 세계 35개국 선수들이 참가한 제1회 서울 오픈 대회를 성대히 개최함으로써 재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또 국제무대에서의 경기와 스포츠 외교 활동을 착실히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4년 10월에는 아시아 탁구연합(ATTU)에 정식가입하게 되었다. 그뒤 ATTU가 주최하는 아시아 선수권대회에도 1984년 제7회 대회부터 꾸준히 참가해오고 있다. 1988년 5월의 제9회 니가타[新潟] 대회에서는 여자단체·여자복식·혼합복식 등 3개 종목에서 우승했고, 1990년 12월에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0회 대회에서도 여자단체 및 혼합복식에서 역시 우승함으로써 탁구 강국으로서의 한국의 이미지를 아시아 무대에 확고히 심었다.
1980년대에도 한국 탁구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활발히 참가해왔다. 더욱이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 경기대회, 올림픽 대회 등 주요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이제 명실공히 세계탁구의 최정상급에 올라 있다. 1987년 제39회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양영자·현정화가 여자복식에서 우승했고, 1989년 제40회 도르트문트 대회에서는 현정화·유남규가 혼합복식에서 우승함으로써 세계 정상의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그동안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지 않고 있다가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남녀 단·복식의 4개 세부 종목이 거행되었다. 탁구로서는 원년 올림픽인 이 대회에서 한국은 유남규가 남자단식에서, 양영자·현정화가 여자복식에서 각기 금메달을 획득해 성과를 올렸다. 1992년 4월 일본 지바[千葉]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는 남북한 단일 팀으로 출전하여 한국의 현정화·홍차옥, 북한의 이분희·유순복이 분전, 여자단체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1993년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열린 제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현정화 선수가 여자단식에서 우승함으로써 처음으로 여자단식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걷던 한국 탁구는 유승민이 2004년 제28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함으로써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이후 16년 만에 값진 성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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