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609. 2. 18, 잉글랜드 윌트셔 딘턴 |
---|---|
사망 | 1674. 12. 9, 프랑스 루앙 |
국적 | 영국 |
요약
잉글랜드의 정치가·역사가.
Viscount Cornbury, Sir Edward Hyde(1643~60), Baron Hyde of Hindon(1660~61)이라고도 함.
개요
찰스 1세와 찰스 2세 때 장관을 역임했으며 〈잉글랜드의 반란과 내전의 역사 History of the Rebellion and Civil Wars in England〉의 저자이다(영국내란).
젊은시절과 경력
에드워드 하이드는 윌트셔 주 딘턴에서 헨리 하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형제들 중에서는 그가 맏이였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고, 런던의 미들템플 법학원에서 법률 수업을 받았다. 1632년 첫 아내인 앤 에일리프가 결혼한 지 6개월도 안 되어 죽었다. 2년 뒤에 그는 토머스 에일즈베리 경의 딸 프랜시스와 재혼했다. 그는 고위 법관인 장인을 통해 법조계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추구할 수 있었고, 민사소송의 영장과 공문서를 기록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또한 문단과 철학계에서도 기반을 잡았고, 극작가인 벤 존슨, 법률가이자 학자인 존 셀던, 정치가인 포클런드 경과 친구가 되었다.
1640년에 그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대한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소집한 단기의회(1640. 4~5)와 영국 내란(청교도 혁명) 때 찰스 1세에 반대한 장기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선박세(국방을 위해 징수한 세금)를 비롯한 왕의 새로운 정책들을 비판해 두각을 나타낸 그는 왕의 특권 남용에 대한 공격에 가세했고, 억압적인 법정과 위원회들을 폐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는 왕과 상원 및 하원의 균형잡힌 관계를 항구적으로 해칠 수도 있는 조치에 반대했고, 왕의 각료 선임권을 제약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했다.
처음부터 그는 국교회를 옹호했고 그로 인해 찰스 1세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왕의 주요 측근 가운데 하나인 스트래퍼드 백작의 처형에 반대하고, 교회의 감독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뿌리와 가지 법안'에 저항했을 때는 찰스 1세에 반대한 의회파 의원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원이 1641년 11월에 대간의서를 채택하여 왕의 각료 임명과 교회 개혁에 대한 의회의 발언권을 요구하자 찰스 1세와 의회의 화해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때부터 하이드는 왕의 조언자로서 막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건한 조치를 추천했는데, 찰스 1세가 이 조치를 일관성 있게 실행했다면 하원에서 급진적 지도자인 존 핌에 대한 지지는 서서히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찰스가 1642년 1월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고 하자 하이드는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다. 내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후로는 거의 아무도 왕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얼마 동안은 하이드의 건설적인 온건함이 효과를 거두었다. 1642년 5월말에 요크에서 왕을 만난 하이드는 '사악한 조언자'로 낙인 찍혀 의회에서 추방당했다. 하이드는 왕당파 참모회의의 일원이 되었지만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 실제 전투원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1643년부터 그는 추밀고문관 및 재무장관으로서 군사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는 왕에게 건의해 1643년 12월 옥스퍼드에서 의회를 소집하게 했다. 그러나 이 의회는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고 1년 뒤에 하이드는 웨스트민스터 의회가 명실상부한 의회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1645년 1월 그는 의회에서 민병대 통제권을 부여하고 장로가 교회를 지배하는 제도를 시행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완화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무렵에는 이미 하이드의 양심적인 입헌주의가 설 자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찰스 1세가 그를 왕세자 웨일스 공의 보호자로 임명한 것은 그를 쫓아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이드는 1645년 3월 찰스 1세를 떠났고 1646년 4월에 왕세자를 수행해 저지 섬으로 갔다.
그후 왕비는 왕세자에게 파리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령했지만 하이드는 이 조치에 반대했다.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하이드는 왕이 최근에 저지른 실수에 대한 그의 해석이 장차 왕에게 교훈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잉글랜드의 반란과 내전의 역사〉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이드는 1648년 파리에서 다시 왕비와 왕세자를 만났지만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구하려는 찰스 1세의 마지막 노력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구경꾼으로 남아 있었다.
하이드는 새 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애썼지만 이 점에서도 역시 그는 무력했다. 찰스 2세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그는 마드리드로 가는 사절단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싸우기를 좋아하는 궁정에서 도망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이 사절단은 스페인의 원조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대법관
찰스 2세가 1651년 가을에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프랑스로 도망친 뒤 하이드는 파리에서 찰스 2세를 다시 만났고, 1654년에 그를 따라 쾰른으로 갔다가 1656년에는 브뤼주로 갔다.
그의 목표는 찰스 2세가 국교회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찰스가 국교회를 포기한다면 신하들과의 화해는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이무렵 잉글랜드는 호국경이라는 칭호를 가진 올리버 크롬웰이 실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이드는 크롬웰에 대한 국내의 저항을 부추겼지만 공화파를 다시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리라는 이유에서 왕당파의 잉글랜드 탈환 계획에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658년 크롬웰이 죽은 뒤, 장로 교회의 왕정복고 건의가 승인되었다. 같은 해 대법관으로 임명된 하이드는 이 건의에 답장을 보냈다. 브레다 선언(1660)은 자유로운 의회가 왕의 의도에 떳떳하게 맞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왕과 의회의 화해를 이룰 수 있다는 하이드의 믿음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타협안은 몇 가지 점에서 그 자신의 계획과는 달라졌다.
대법관으로서 하이드는 대부분의 공화파가 왕당파의 보복을 면하게 하는 너그러운 대사령과 국왕 수입의 신속한 지급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군대 해산을 서둘렀고,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화해정신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반동이 절정에 이른 1661년에 선출된 의회는 느긋한 찰스 2세나 성공회 교도인 대법관이 원한 것보다 훨씬 가혹하게 비국교도를 박해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하이드는 총리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1661년에 클래런던 백작의 작위를 받고 행정의 거의 모든 분야를 관장했다. 딸 앤이 1660년에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와 결혼하자 하이드는 왕족과 인척이 되었고, 결국 메리 2세와 앤 여왕의 외조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정 복고에도 불구하고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한 왕당파들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런 명예를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클래런던은 또한 됭케르크를 프랑스에 팔아버리는 등, 몇 가지 인기없는 결정에도 책임이 있었다. 1665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영국-네덜란드 전쟁). 그는 이 전쟁에 반대했지만 이 전쟁은 결국 그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실각
그가 악평을 얻은 데에는 몇 가지 개인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는 지겨운 상대를 기꺼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통풍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성미가 더욱 급해졌다. 그가 왕의 부도덕성을 공공연히 비난하자 왕과 하이드 사이의 오랜 우정은 사라졌고, 클래런던은 젊고 경박한 궁정의 표적이 되었다. 동맹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는 보호해 줄 사람도 없이 공격에 노출되었고, 의회는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전쟁의 참극을 그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667년 8월 클래런던은 대법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0월에 하원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하원의 비난에는 근거가 없었다. 상원은 이 고발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특별법정에서 그의 죄를 재판하겠다고 위협하자 11월 프랑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편지를 주고 받는 것마저 반역죄로 규정한 추방령 때문에 클래런던은 고국과 연락이 끊긴 채,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는 명예를 회복하기로 작정하고, 1630~60년대 자신의 정치생활을 기술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서전을 쓰기에는 참고할 만한 문서나 증거서류가 부족했다.
1671년에 로렌스는 아버지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아버지의 원고를 프랑스로 가져왔다. 여기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1640년대의 〈역사 History〉도 포함되어 있었다. 클래런던은 최근에 쓴 자서전의 일부를 이 원고에 삽입해 〈역사〉를 완성했다. 그결과 완성된 〈잉글랜드의 반란과 내전의 역사〉는 원고를 쓴 연대에 따라 정확도에 상당한 차이가 난다. 〈역사〉와 나중에 자서전의 나머지 부분을 편집하여 출판한 〈전기 Life〉의 결함이 증거 서류가 불충분한 탓은 아니다.
클래런던은 신중한 온건함을 유지했고 그의 산문은 품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가 항상 객관적인 역사가였던 것은 아니다. 반대자들에 대한 그의 설명은 공정하지 못할 때가 많고, 자신이 참여한 사건에 대한 분석은 당시의 판단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은 쓰라린 망명 생활 동안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옹호하기 위해 쓴 저서에 피할 수 없는 결점으로 나타나 있다. 클래런던은 죽은 지 한 달 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