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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6년 7월 16일,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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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5년 2월 22일,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한 19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나르니 다리>와 <모르트퐁텐의 추억>. 유복한 집안 출생으로 루브르 박물관과 신고전주의자 화가들에게서 미술을 배웠으나, 풍경 스케치와 경험을 통해 배우기를 좋아했다. 수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경치를 그렸고, 아비뇽과 프랑스 남부지방, 스위스, 네덜란드, 런던 등을 여행하며 스케치를 남겼다. 1860년 새로운 양식의 풍경화인 <회상>을 그렸다. 1830년대에 파리 살롱전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해 좋은 평을 받았고, 1867년 레지옹 도뇌르의 임원으로 추대되었다. 당시에는 풍경 스케치가 회화 작품을 위한 소재로 여겨졌을 뿐이지만 코로 이후 풍경 스케치도 미술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와 베르트 모리조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요
주로 풍경화로 유명하다.
인상주의 풍경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것을 예고했다고 볼 수도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선명한 색으로 두드러진 그의 유화 습작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완성된 작품에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초기
코로는 유복한 유산계급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스위스 태생의 어머니는 여성용 모자 가게를 경영했으며, 아버지는 포목 상인이면서 동시에 모자 가게의 경영을 도왔다. 그는 학교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으려고도 노력했지만 그것은 더욱 소질이 없었다. 마침내 25세 때 아버지로부터 겨우 허락을 받아내어 그가 늘 꿈꾸어오던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랑스의 모든 미술가들의 입문 시절과 마찬가지로 코로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신고전주의 풍경화가인 피에르 앙리 드 발랑시엔의 제자들인 아실 에트나 미샬롱과 장 빅토르 베르탱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약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코로는 처음부터 야외에서 그가 본 풍경을 스케치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선호했다.
1825년 가을 로마에 갔는데, 그곳에서 보낸 3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로마와 그 주변 캄파냐 지방의 풍경을 그렸으며, 나폴리와 이스키아를 여행한 뒤 베네치아를 거쳐 파리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아주 행복해했으며 1826년 8월에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생애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풍경을 그리는 것이네. 이 확고한 결심 때문에 나는 다른 어떤 일에도 심취하지 못할 것 같다네. 말하자면, 나는 결혼하지 못할 것이네." 그는 과연 독신으로 살았다. 여성과의 교제는 그의 생애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그는 전생애를 그림에 바쳤다.
프랑스로 돌아오자 코로는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 생활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봄·여름에는 항상 야외에서 지내면서 자연을 직접 보고 작은 유화 습작과 소묘를 그렸다. 그는 자기 미술의 기초를 이루는 색조의 연관성에 정통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색채의 선택보다는 밝고 어두운 색조들 사이의 균형과 변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파리에 있는 작업실로 가서 대작을 그리곤 했는데, 그는 매년 5월에 열리는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준비하는 것을 즐겼다.
초기의 주요작품인 〈나르니 다리 Le Pont de Narni〉는 그가 아직 이탈리아에 있을 때인 1827년에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1833년에 그는 퐁텐블로의 숲을 주제로 한 대형 풍경화를 전시하여 2등상을 받았고 이로 인해 코로는 심사위원단의 승인 없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1834년 5~10월에 2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볼테라·피렌체·피사·제노바·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호수 지방의 경치를 그렸다. 1843년 여름에 마지막으로 잠깐 동안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이미 2번째 시기에 작은 스케치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그것으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코로는 이렇게 이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빼놓고는 대단히 무사평온한 생활을 했다. 젊은시절 그는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스케치를 남겼다. 나이가 들자 차츰 여행이 뜸해졌다. 주목할 만한 여행으로는 1836년 아비뇽과 프랑스 남부지방, 1842년에 스위스를 여행한 것에 이어 1854년에는 네덜란드, 1862년에는 런던을 방문한 것을 손꼽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그가 좋아했던 지역은 퐁텐블로 숲과 브르타뉴, 노르망디 해안, 파리 근처 빌다브레에 있는 코로 가문의 소유지 등이며, 말년에는 친한 친구들이 살고 있던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와 두에를 자주 찾았다.
전생애에 걸쳐 코로는 때로 지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주는 풍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샤르트르 대성당(1830)이나 두에의 종탑(1871)과 같은 건물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꾸밈 없이 그린 작은 스케치와 살롱전을 위해 그린 마무리가 잘 된 대작으로 나누어진다.
19세기초에는 대체로 스케치가 공공 전시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그림을 사고자 하는 전문 수집가들이 매우 적었다. 완성된 풍경화들이 선호되었으며 특히 여기에 전설이나 문학, 성서에 나오는 영웅적인 인물형을 몇 명 첨가한다면 훨씬 더 품위 있고 무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코로는 〈황야의 하가르 Hagar in the Wilderness〉(1835년 살롱에 전시)·〈악타이온에 의해 놀란 디아나 Diana Surprised by Actaeon〉(1836년 살롱)·〈호메로스와 양치기들 Homer and the Shepherds〉(1845년 살롱)·〈올리브 동산의 예수 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1849년 살롱) 등의 제목을 단 작품들을 전시했다.
사실 그는 그러한 주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19세기 중반에 기호가 바뀜에 따라 그것에 대해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그는 풍경화에 예쁜 아가씨들을 그려 넣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양치기로 묘사하거나 때로는 연못에 작은 발을 담그고 있는 누드나 반나(半裸)의 목욕하는 여자로 묘사하곤 했다. 1860년대에 새로운 양식의 풍경화인 〈회상 Souvenirs〉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차분하고 우수에 찬 분위기를 자아낼 때 쓰는 기본 요소들을 활용했다. 그것은 대개 전체적으로 은빛 색조의 호수에 투명하게 비치는 나무들을 그려넣는 것이었다.
말년에는 수많은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 특히 그의 작업실에서 꽃이나 악기를 들고 있거나 이젤 위에 놓인 풍경화를 바라보면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젊은 여인들을 그렸다. 이러한 사적인 그림들은 거의 전시하지 않았다.
1830년대에 코로는 파리 살롱전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하여 그런대로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거의 팔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서 받는 돈으로 만족했다. 그뒤 1840년에 정부에서 그의 전시 작품들 중 하나인 〈어린 양치기 Le Petit Berger〉를 샀으며, 5년 뒤에는 시인 겸 미술평론가인 샤를 보들레르가 1845년의 살롱전에 관한 그의 평론에서 "코로는 현대적인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했다"고 썼다.
184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47년 그의 아버지가 죽자 화가가 되려는 그의 야망에 대한 식구들의 지원에서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성공의 시기
1850년대에 이르러 수집가들과 화상들이 그의 그림들을 열심히 수집하기 시작했고 코로는 그뒤로 물질적인 어려움은 겪지 않게 되었다.
그는 여러 살롱전에 계속 대작들을 출품했으며 거기에서 그것들은 고가에 팔렸다. 1855년의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그는 회화부문 1등상을 받았으며, 나폴레옹 3세도 그의 그림을 샀다. 1867년 레지옹 도뇌르의 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어 특히 미국의 개인 수집가들은 스케치에 가까운 코로의 작은 작품을 사기 시작했다. 그는 다작의 미술가이고 3,0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코로의 작품은 많이 모사되고 위조되었다.
20세기에는 코로에 대한 평가가 다시 바뀌어 부자연스럽게 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후기 작품들보다는 좀더 자연스러운 초기의 스케치들이 두드러지게 선호되었다. 살롱 전시용의 대형 그림들은 그 수준이 하찮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더이상 인기를 끌지는 못하게 되었다.
코로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했기 때문에 언제나 일에 열심이었으며 그때문에 다른 것에는 거의 시간을 내지 못했다. 노년에 그는 통풍을 앓았으나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다. 그는 결코 신문을 읽지 않았으며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당대에 일어난 혁명이나 제도적 변화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대체로 그는 거의 글을 읽지 않았으며 어떠한 지적인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음악, 특히 하이든·모차르트·글루크·베토벤을 매우 좋아했으며, 파리에 있을 때에는 정기적으로 음악회에 갔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화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후기 작품은 특히 음악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는 그림에서 결코 현대적 세계를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풍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농부이거나 신화와 문학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그의 생전에 프랑스 전역에 개통된 광활한 철도·공업·무역 발전 등의 획기적인 사회변천에 관한 표현은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코로는 동료 화가들과의 교제를 즐겼으며 바르비종파 미술가들, 특히 장 프랑수아 밀레,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와 친하게 사귀었고, 풍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와 같이 비교적 성공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한편 코로는 젊은 화가들을 공공연하게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인상주의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와 베르트 모리조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이렇게 해서 '파파 코로'(Papa Corot)는 말년에 그 친절함과 관대함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다.
19세기 회화에서 코로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대의 주요대가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의 업적은 매우 중요하다. 대체로 그의 대형 그림들은 다소 공허하고 과장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습작들은 참신한 관찰과 자연스런 쉬운 기법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풍경 스케치가 회화 작품을 위한 소재로 여겨졌을 뿐 그 자체로는 결코 뛰어난 미술 작품이 되지 못했다. 코로는 완성된 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와 자연스러움 등 자연의 본질적인 특성을 스케치를 통해 처음으로 보여준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말년에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풍경화보다는 스케치가 인기를 끌었다. 코로는 인상주의 풍경화가들의 출현에 이바지했으며, 인상파 화가들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를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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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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