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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
Keltic이라고도 씀.
로마 이전 시대와 로마 시대에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용되었고, 지금은 주로 영국 제도에서 쓰인다.
켈트어파는 지리적·역사적으로 대륙 켈트어(또는 대륙 켈트어군)와 도서 켈트어로 나눌 수 있다. 대륙 켈트어는 흔히 갈리아어라고 하며, 비문과 고전 인용문을 통해 조금 알려져 있다. 근대 켈트어파를 이루고 있는 도서 켈트어는 다시 고이델어군(아일랜드어·맨섬어·스코틀랜드 게일어)과 브리톤어군(웨일스어·콘월어·브르타뉴어)으로 나뉜다.
대륙 켈트어는 BC 500년경부터 AD 500년경까지 갈리아 지방에서 남쪽의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갈라티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널리 쓰였다.
대륙 켈트어에 대한 문헌 기록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이 인용한 이름과 고고학 비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언어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도서 켈트어는 아일랜드켈트어와 브리튼켈트어로 나뉜다. 아일랜드어는 늦어도 5세기부터 아일랜드에서 쓰였고, 아일랜드어와 함께 아일랜드켈트어로 분류되는 2가지 언어(스코틀랜드게일어·맹크스어)는 그무렵 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와 맨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결과로 생겨났다. 브리튼켈트어는 원래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맨 섬에서 사용했던 켈트어이다.
스코틀랜드와 맨 섬에서는 브리튼켈트어 방언들이 아일랜드켈트어로 바뀌었지만, 남부에서는 웨일스어와 콘월어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머지 브리튼켈트어인 브르타뉴어는 5, 6세기에 식민지 건설과 더불어 브르타뉴로 건너갔다. 도서 켈트어에 대한 문헌은 7세기에 고대 아일랜드어로 씌어진 필사본과 그보다 조금 뒤에 브리튼켈트어로 씌어진 필사본에 바탕을 두고 있어 도서 켈트어의 초기 성격과 발달 과정은 대륙 켈트어보다 많이 알려져 있다.
켈트어파의 기원은 대륙 켈트어와 도서 켈트어의 공통조어인 공통 켈트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상당히 많은 양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고대 아일랜드어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켈트어이기 때문에 공통 켈트어와 가장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 언어를 연구한 결과는 공통 켈트어가 자음과 모음 체계뿐만 아니라 명사와 형용사의 구조에서도 조상언어인 인도유럽 조어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도서 켈트어의 동사 위치는 인도유럽어의 공통된 위치인 문장의 마지막에서 근대 켈트어 방언들의 공통된 위치인 문장의 처음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공통 켈트어 사용자들은 아마도 중부 유럽의 동쪽 지역에서 살았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게르만족과 가까웠을 것이다.
근대 켈트어는 모두 도서 켈트어의 자손이며, 켈트 어파 가운데 자세히 알려진 것은 이 언어들뿐이다. 이들 언어에서는 다른 인도유럽어에 거의 없는 언어적 특징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특징들은 BC 500년경에 켈트족이 브리튼 섬에 침입한 뒤 켈트족이 아닌 그 섬의 원주민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징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는 자음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근대 켈트어는 강하게 발음되는 자음과 약하게 발음되는 자음을 구별하는데, 강한 자음은 어두와 일정한 연속 자음에 나오고, 나머지 위치에는 약한 자음이 나온다. 다른 인도유럽어에서는 이런 현상이 낱말 중간에 나타나지만, 도서 켈트어에서는 낱말 중간만이 아니라 모음으로 끝난 낱말 뒤에 나오는 낱말의 첫 소리가 자음이고 그뒤에 바로 모음이 나오는 경우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도서 켈트어의 또다른 독특한 특징은 동사의 부정사형(영어의 'to be'나 'to go' 같은 형태)이 없다는 점이다.
그 대신 동명사(예를 들면 'the going of the woman')를 쓴다. 적절한 전치사가 앞에 나올 경우, 이 동명사는 동사의 현재진행형(예를 들면 'the man is doing', 'he is going')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도서 켈트어의 이런 특징은 근대 영어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브리튼 섬의 원주민에게서 영향을 받은 탓으로 돌릴 수 있다.
3개의 근대 아일랜드켈트어(아일랜드어·스코틀랜드게일어·맹크스어) 중에 글로 씌어진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은 아일랜드어이다.
오검 비문(碑文)시대(300~500)에 이어 라틴 문자가 아일랜드에 도입되었고, 곧 이어 구전이 문학형태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600~900년에 이르는 이 시대를 고대 아일랜드어 시대라고 한다. 8세기의 바이킹족 침략으로 그동안 언어의 순수성을 지켜온 수도원은 혼란을 겪게 되었고, 900년경에는 중세 아일랜드어 시대가 열리면서 통속적인 형태가 이 언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앵글로노르만족의 침략은 다시 한번 이 언어를 표준화하도록 아일랜드 문학자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1200년경에 이루어진 이 재표준화 작업은 근대 아일랜드어 시대를 열었다. 17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영국 세력이 강해지자 영어가 좀더 널리 쓰이게 되었고, 아일랜드어 사용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약 30만 명이 아일랜드어를 읽을 수 있지만, 아일랜드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5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근대 아일랜드어는 스코틀랜드 시인들이 자신의 고유 방언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17세기까지는 스코틀랜드의 표준 문어였다.
스코틀랜드게일어 역시 영어의 위협을 받아왔지만, 스코틀랜드게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의 수는 8만 명이 넘을 것이다. 맨 섬에서 쓰이는 맹크스어가 맨 처음 문헌으로 기록된 것은 1610년이었고, 18세기까지만 해도 맨 섬 거주자들 가운데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맹크스어 사용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20세기 초반에는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브리튼켈트어 사용자들에게 일상어를 기록하는 습관을 소개했을 당시만 해도 브리튼켈트어의 방언들은 서로 아주 비슷했지만, 곧 달라지기 시작했다.
8~12세기에 웨일스어로 씌어진 문헌 기록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지만, 연속적인 기록은 12세기에 와서야 시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근대 웨일스어 문어는 1588년에 웨일스어 성서가 만들어지면서 표준화되었다. 웨일스 지방에서도 영어가 번성하기 시작했지만, 18세기에 되살아난 감리교회가 웨일스어의 쇠퇴를 막았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노동자들이 웨일스 지방의 광산과 공장으로 몰려오자 웨일스어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1901년에 이르자 웨일스어 사용자수는 웨일스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1961년에는 웨일스 인구의 1/4만 웨일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웨일스의 시골 사람들은 지금도 대부분 웨일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학교에서 웨일스어 사용을 늘리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브르타뉴어에 대한 문헌은 15세기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15세기부터 브르타뉴어 방언들은 점점 분화되기 시작했다.
20세기초에 브르타뉴어의 4개 방언을 표준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브르타뉴어를 학교에서 배제하려는 프랑스의 공식 정책 때문에 브르타뉴어를 배우면서 자라는 어린이는 거의 없다. 브르타뉴어와 마찬가지로 콘월어에 대한 문헌도 15세기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초까지는 콘월어가 간헐적으로 쓰였지만, 18세기말에는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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