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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캐나다는 1867년 7월 1일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때에 자치령을 형성했고, 그후 영토를 브리티시컬럼비아 동부 경계까지 확장했다.
이 식민지는 1866년 밴쿠버 섬과 합병한 뒤 캐나다 연방에 가맹하기 위한 운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연방 합병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동부로 통하는 철도의 부설을 연방에 요구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1871년 캐나다 연방에 가맹했다. 1873년에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가 유리한 조건으로 캐나다 연방에 가맹하는 데 성공했다.
1880년 영국 정부가 북극해의 모든 섬의 관할권을 캐나다 연방에 이관함으로써 캐나다 컬럼영토는 급속히 확장되어갔다.
1873년 알렉산더 매켄지를 수반으로 하는 자유당 내각이 자유보수당에 이어 정권을 잡았다. 매켄지 정권은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캐나다 연방 가맹에 관한 협약을 이행하는 한편 철도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건설을 인수할 개인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국가 세입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부분적인 건설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주민들의 분노를 사 연방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이무렵 야당이었던 보수당은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강으로 내걸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는 데 몰두했다.
자유보수당의 맥도널드는 드높은 국민의식과 기업의 요구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를 고려하여 '국책'(國策 : National Policy)을 제시했다. 그는 이 국책에서 캐나다 산업의 보호를 약속했다. 1878년 자유보수당은 이 국책을 정강으로 선거에 임해 정권을 잡았으며 이듬해에는 지금까지 세입만을 목적으로 한 관세에 보호관세정책을 적용시켰다.
보수당 정부는 정권을 잡자 바로 태평양철도의 건설에 착수했다. 캐나다태평양철도회사가 설립되어 정부로부터 서부의 약 1억 125만㎢의 토지와 조성금 2,500만 달러를 받고 철도부설작업을 개시하여 1885년 완성했다.
리엘의 반란
북서부 지역에서는 1869, 1885년 2차례에 걸쳐 반란이 일어났다.
그곳 주민들은 주로 '메티스'(metis)로 불리는 프랑스 혼혈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프랑스 문화의 전통이나 종교, 특히 토지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루이 리엘을 지도자로 캐나다 정부에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2차례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이것은 2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캐나다 정부가 메티스와 인디언이 북서부 변경의 식민지를 대표하여 연방 의회에 의원을 보내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식량을 배급하고 토지의 권리서를 발행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킨 점이며, 다른 하나는 리엘이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진 점이다.
퀘벡에서는 그의 처형에 대해 항의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퀘벡의 주민들은 지금도 리엘을 영웅시하고 있다. 리엘의 처형으로 연방 의회의 의석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퀘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의식이 강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정권이 대두하여 예수회 부동산법(Jesuit Estates Act)을 성립시켰다.
이 법은 1773년에 해산되어 토지를 몰수당한 예수회에 대한 보상을 규정한 것으로 법이 성립된 뒤 정부는 로마 교황에게 보상금의 지불 방법을 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온타리오 주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분노를 샀으며 자유보수당의 정치가 매커시는 교황의 '캐나다 내정개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889년 매커시는 1870년의 매니토바 조령에 의거해 종파별 학제가 실시되고 있던 매니토바 주에 가서 가톨릭이 세력을 증대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에 자극을 받아 매니토바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 것과 가톨릭 학교를 인정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매니토바의 프랑스계 주민 및 가톨릭 교도의 권리에 대한 비난은 법정에서의 분쟁으로까지 발전했고 그결과 매니토바 주는 종전과 같은 입법권을 인정받았다(매니토바 법, 프랑스계 캐나다인).
미증유의 번영
자유당이 행정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1880, 1890년대의 심각한 불황이 끝나고 경기 회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정권을 잡은 점이었다.
캐나다는 1896~1912년 전례 없는 번영을 이루었다. 그결과 서부에도 이주자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이와 같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초원지대의 밀 생산량의 급속한 증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캐나다 북부철도 및 캐나다 대륙횡단철도와 연결되는 태평양 대간철도(Grand Trunk Pacific)가 건설되었다. 1905년에는 앨버타 주와 서스캐처원 주가 설립되어 다른 주와 동등한 자치가 인정되었다.
반미 감정
1911년 로리에 내각은 반미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한 와중에 붕괴되었고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호황시대가 끝나기 시작한 시기에 로버트 보든을 수반으로 하는 보수당 정권이 권좌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의 벨기에 침략이 시작되자 캐나다는 영국과 합동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1917년 이후 캐나다는 영국 전시내각을 통해 전쟁지도에 관여하게 되어 보든 총리가 영국 정부의 작전회의에 참석했다. 종전 후의 강화회의에도 참가하게 되어 영연방 내의 일국으로서 조약에 조인했으며 독립국으로서 국제연맹에 가맹했다.
전후의 정세
국내에서는 종전 직후부터 경제가 침체하면서 생활비의 앙등과 농산물 가격 하락에 시달려 전국적으로 민심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태의연한 제정당에 반항하여 정치활동을 개시했으며 몇개 주에서는 주정부를 점거하기도 했다. 그후 농민들의 전국적인 정치운동을 주체로 하는 전국진보당(National Progressive Party)이 결성되었다. 노동자계급의 불안은 생활비의 앙등, 캐나다 서부에 확산된 노동조합운동, 혁명사상의 침투 등이 원인이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가장 격렬했던 것은 1919년 위니펙에서 일어난 총파업이었다.
또한 캐나다 북부철도와 태평양 대간철도가 도산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후 캐나다 정부가 재건에 착수하여 1923년 캐나다 전국철도가 개통되었다.
그후에도 퀘벡 주에서는 프랑스계 유권자들이 보수당 정부로부터 계속해서 소외당했다. 이에 자유당은 로리에를 계승할 당수로 퀘벡 주민에게 환영받을 만한 인물인 윌리엄 L. 매켄지 킹을 선출했다.
1921년의 선거에서 킹이 이끄는 자유당은 퀘벡 주에서 완승을 거두었으며 진보당의 지지를 얻어 자유당 소수파 내각이 탄생했다. 1920년대 전반을 휩쓴 불황도 후반에 들어서서는 호황으로 돌아섰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여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공업 역시 외국 자본의 유입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미국이나 영국의 기업이 캐나다에 진출하여 공장을 건설한 것이었다. 자유당은 계속해서 퀘벡 주민의 지지를 얻었으며 점차 투쟁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진보당원들을 흡수해갔다.
대외정책
이 시대에 캐나다는 대외관계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캐나다가 단독 국가로서 외교상의 대표권을 주장하여 승인된 것은 1920년이었으며, 1921년에는 최초로 캐나다의 공사관이 워싱턴에 설치되었다. 뒤이어 파리·도쿄[東京]에 공사관이 설치되었으며 1923년에는 독립국가로서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받아 미국과 우호협정을 체결했다. 이처럼 자치체로서 몇 가지 주장이 승인된 뒤에는 대영제국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성명을 발표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1926년 대영제국회의에서 성명 방식이 결정되어 "영연방의 각 자치령은 영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연합하여 있는 국가이며 각각의 나라를 결합해주고 있는 것은 공통 군주에 대한 충성심뿐이다"라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이 제정되었으며 이로써 대영제국의 선언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경제정세의 변모
1930년대에 캐나다도 세계 각국에 밀어닥친 경제불황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초원지대가 오랜 기간 가뭄에 시달리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30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패배하고 리처드 베넷(뒤의 자작)을 수반으로 하는 보수당이 1935년까지 정권을 잡았다. 같은 해 정권은 다시 자유당에게 넘어 갔다가 국가연합당(Union Nationale)이 1936년에 정권을 잡았다.
캐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것은 영국의 선전포고가 있은 지 1주일 후였는데 이는 독립국가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캐나다에서는 국제연맹의 이상이 국민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국제연맹의 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국제연맹이 1930년 만주사변 당시 일본이 취한 행동에 대한 제재를 결의했을 때 그에 대한 지지를 삼가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에 대해 국제연맹이 경제제재를 가할 것을 결의했을 때도 캐나다 대표는 이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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