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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든

다른 표기 언어 Sir Robert (Laird) Bo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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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4. 6. 26, 캐나다 노바스코샤 그랑프레
사망 1937. 6. 10, 오타와
국적 캐나다

요약 캐나다의 제8대 총리(1911~20) 겸 보수당 당수(1901~20).

특히 국제연맹에 캐나다가 별도의 회원국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캐나다의 위상을 식민지에서 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4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그는 노바스코샤의 작은 마을 그랑프레에서 태어났다. 15학년에 달하기 전에 정식 교육을 마치고 그당시 다니고 있던 사립학교의 조교직을 맡았다. 1874년에 교사 생활을 마치고 핼리팩스에 있는 한 법률사무소의 수습생이 되었다. 1878년 노바스코샤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법조계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올랐으며, 1889년 로라 본드와 결혼한 후 법률사무소를 설립하여 후에 연해주(沿海州)들에서 최대 규모의 사무소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키웠다.

'캐나다 연방 설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인 찰스 히버트 터퍼 경과의 우정이 그로 하여금 1896년 핼리팩스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 지명을 수락하게 했다. 보든의 정계 투신은 윌프리드 로리어 경이 영도하는 자유당의 승리와 시기를 같이 했다. 첫 임기중에는 야당의 평범한 초선의원으로 머물렀지만, 1900년 재선에 성공하자 간부회의에서 임시 당수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간부회의의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를 당수직에서 몰아내려는 음모가 거듭되고 본인도 당수직이 싫다고 여러 번 실토했음에도 불구하고 1911년까지 그 자리를 지킨 결과 미국과의 한 호혜무역협정을 수락하기로 한 자유당의 결정을 호재로 이용하여 총선에서 로리어를 꺾고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총리로서 보든의 큰 관심사는 영국과 캐나다의 관계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제국의 정책 수립에서 캐나다의 발언권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영국에 3척의 전함 건조비 3,500만 달러를 보조하는 것을 포함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수립된 그의 해군 정책은 제국회의에서 캐나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섞인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 전쟁 초의 2년 동안 보든은 영국의 정책 결정에 캐나다가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빈번히 언급했지만,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가 1917년 제국전시내각(IWC)을 구성하고 나서야 비로서 보든이 캐나다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런던에서 개최된 IWC 회담과 그후 베르사유 조약 협상중에 파리에서 열린 회담에서 보든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4개조를 지지하고, 영국과 미국이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한 동맹을 맺는 것이 캐나다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보든은 제국의 정책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캐나다가 국제연맹에 독자적인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제국 연방을 구성국들 가운데 소국들이 대국의 이익에 따라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부단한 협의과정을 거친 후에만 가능한 일종의 동맹관계로 보았던 것이다.

보든의 보수당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미증유의 행정적·재정적·정치적 난제들에 부딪쳤으며, 캐나다의 지원병이 50만 명이나 해외에서 복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나다군의 완전한 병력 유지를 위해 징병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보든은 연립 정부의 구성을 제의했다.

1917년의 선거에서 연방주의 지지 세력이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쟁 노력에의 완전참여와 캐나다의 국제적 역할을 골자로 한 정책들을 보든은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정부에 참여하지 못하고 정부의 정책들에 반대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반발을 감수해야만 했다.

보든의 첫번째 내각이 국내 문제에서 제대로 실적을 올리지 못한 원인의 일단은 그가 영국과 캐나다의 관계에 몰두한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유부단하여 말썽 많은 민병장관(民兵長官) 샘 휴즈를 1916년 말까지 해임하지 않았다. 무능과 매관매직과 전쟁모리에 대한 비난의 화살들이 보든의 행정부에 쏠리면서 보든에 대한 국민의 신임이 떨어졌다. 그러나 징병 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에게 내각을 개편하고 자기의 주변에 유능한 동료들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후에 총리직을 계승하게 되는 아서 미언이 하원 총무직을 맡고 2명의 자유당의원 뉴턴 로월과 알렉산더 K. 매클린이 내각의 중요한 위원회들을 담당함으로써 보든은 런던과 파리에서 검토중인 보다 큰 문제들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정책을 지지했으며, 거기에 캐나다군이 참가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3,000명 규모의 캐나다 원정군을 상륙시키고 그 군대가 장차 무역상의 이권을 얻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지만, 여론의 압력으로 인하여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든은 1919년의 위니펙 총파업의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형법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의회에서 서둘러 통과시킨 법률의 선동에 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그들을 기소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로 인해 노동자들의 적의를 사게 되었다.

그는 1920년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은퇴 후 그는 워싱턴 해군군측회담(1921)에 캐나다의 사절로 참석했으며, 〈캐나다 헌법 연구 Canadian Constitutional Studies〉(1922)·〈영연방 내의 캐나다 Canada in the Commonwealth〉(1929)를 저술했다. 그는 〈회고록 Memoirs〉(1938)도 발표했는데, 그 편집은 그의 조카 헨리 보든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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