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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전근대시대 춘궁기에 국가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주었다가 수확기에 갚게 하는 제도.
'진'은 흉년에 굶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이고, '대'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뒤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므로, 진대는 흉년이나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제도는 전근대사회의 농업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생활이 불안정한 농민들을 도와 재생산을 원만히 이루어지게 하려는 사회정책의 일환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펴나가던 중에 처음 실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4년(고국천왕 16)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크게 상하자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미곡을 나누어주었고, 그해 10월에 고국천왕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길 옆에 앉아 우는 자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저는 본래 가난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해왔는데 올해에는 흉년으로 품팔이할 곳이 없어 1되의 양식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 이어 안팎의 관사(官司)에 명령하여 홀아비·과부·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서 구호하게 했다.
또 관리에게 명령하여 해마다 3월부터 7월까지 관곡(官穀)을 풀어 식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등급을 정해서 꾸어주고, 10월에 갚도록 하는 것을 상례로 삼게 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사회변동에 따라 가난한 농민이 대거 늘어나 사회불안을 야기시키자 이들의 생활안정을 꾀하기 위해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책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신라에서도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에도 재해를 입었을 경우 국가에서 곡식을 내어 진휼한 사례가 있었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태조 때는 흑창(黑倉)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주었다가 추수 때 갚도록 한 바 있으며, 986년(성종 5)에 대폭 늘려서 그 기금으로 쌀 1만 석을 증가시키는 한편 이름도 의창(義倉)으로 바꾸고 제주부(諸州府)에 설치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그뒤 1023년(현종 14)에는 기금 확보책이 마련되어 더욱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모든 전정(田丁)은 지목(地目)과 넓이에 따라 의창미(義倉米)를 납부하도록 제도화했는데, 1과공전(一科公田)은 결당 조(租) 3두(斗), 2과공전 및 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양반전은 결당 조 2두, 3과공전과 군인호정(軍人戶丁)·기인호정(其人戶丁)은 결당 조 1두씩 부담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흉년 등의 어려운 시기에 대여해주었다가 역시 가을에 갚도록 했지만, 기록을 보면 이러한 '진대'뿐 아니라 '진급'(賑給)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시대 의창은 유상의 대급(貸給)뿐만 아니라 무상의 진급(賑給)을 함께 실시했던 것 같다. 또 종래에는 의창미를 대여할 경우 이자를 받았던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었지만, 의창의 기금이 백성들의 전정에서 거두어 마련된 것이고 또 무상의 진급이 시행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사〉 우왕 4년조의 기록에 의창미에 대해서는 이식(利息)이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자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창은 고려 후기에 들어와 가끔 끊어지긴 했지만 고려 전시기를 통해 지속되었다. 그밖에 상평창(常平倉)도 처음에는 물가조절기관으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의창과 같이 진대의 역할도 맡아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상평·환곡(還穀)의 제도로 정비·발전되었다.→ 환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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