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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94(충렬왕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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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39(충숙왕 복위 8) |
국적 | 고려, 한국 |
종교 | 불교 |
재위 | 재위 1313년∼1330년, 복위 1332년∼1339년 |
시호 | 의효대왕(懿孝大王) |
능묘 | 의릉(毅陵) |
요약 고려 제 27대 왕이자 충선왕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만, 자는 의효.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왕위계승을 받고 돌아와 즉위했으며 원나라의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 및 내시 선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했다. 1330년 태자 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로 갔으나, 충혜왕이 황음무도하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어 1332년 복위했다. 그러나 복위 후로는 사냥과 잔치에 몰두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몽골 이름은 아자눌특실리(阿刺訥忒失里).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몽골인 의비(懿妃:몽골 이름은 也速眞)이다. 비는 원나라 영왕(營王) 야광티무르(也光帖木兒)의 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 원나라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몽골인 경화공주(慶華公主)이다. 1299년(충렬왕 25)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으며, 그뒤 강릉대군에 봉해졌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왕위를 전위(傳位)받고 돌아와 즉위했다. 1314년 민지·권보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했다. 또한 명주에 두었던 강릉도존무사영(江陵道存撫使營)을 등주(登州:지금의 안변)로 옮겨 북방방비를 강화했으며,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양광도로,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를 경상도로, 교주도를 회양도(淮陽道)로 고쳤다. 1315년 동당시를 응거시(應擧試)로, 지공거(知貢擧)를 고시관(考試官)으로 개칭했다. 1318년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송영(宋英)을 보내 이를 평정했다. 그해 여러 고을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했으며, 전직·산직 관리와 수도 양반들이 윤번으로 근무하던 진변별초제도(鎭邊別抄制度)를 복구했다. 앞서 상왕인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물려받은 고(暠)가 고려 왕위를 노리고 원나라에 무고함으로써 1321년 연경(燕京)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고 5년간 체류했다. 그동안 조적(曺頔) 등의 모략으로 그를 시종하던 오잠(吳潛)·조연수(趙延壽) 등도 모두 심양왕에게 아부하고, 또 이들 심양왕 일당이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 본국과 같이 다스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자 차츰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1325년 귀국하여 이듬해 심양왕에게 선위(禪位)할 계획을 세웠으나 한종유(韓宗愈) 등의 반대로 취소했다. 1330년 태자 정(禎:충혜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로 갔으나, 충혜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복위했다. 충숙왕은 원나라의 무리한 세공(歲貢)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貢女)·환자(宦者)의 선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으나 심양왕의 무고로 원나라에서 체류하고 돌아온 뒤로는 사냥과 연락(宴樂) 등에 몰두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예서(隸書)에 능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의릉(毅陵)이다. 시호는 의효(懿孝)이며, 원나라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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