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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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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39(충숙왕 복위 8) |
국적 | 고려, 한국 |
요약 고려 후기의 권세가·반역자.
의흥군(義興郡) 역리 출신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충렬왕 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세를 내외에 떨쳤으며,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아 우상시(右常侍)가 되었다. 1312년(충선왕 4) 환관을 바치기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충숙왕대에는 밀직사에 들어갔다.
일찍이 염승익(廉承益)의 서녀(庶女)와 혼인했는데, 장인의 외손인 허경(許慶)과 재산을 놓고 다투다가 충숙왕의 총애를 받던 최안도(崔安道) 등의 비판을 받았으나, 당시 원나라의 수도에서 상왕(上王)으로 고려의 국정을 좌우하던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어 오히려 최안도를 참소하여 섬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의 배후세력이었던 원나라 인종(仁宗)이 죽고 충선왕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선부전서(選部典書)로 좌천되고 최안도가 다시 세력을 잡게 되는 등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호군(護軍) 고자영(高子英) 등과 모의하여 원나라로 도망, 심왕(瀋王) 고(暠)의 옹립운동을 전개했다. 1321년 충숙왕이 원나라로 불려가서 국왕인을 빼앗기고 원에 머무는 동안 채하중(蔡河中)과 더불어 갖은 모략으로 충숙왕을 비방했으며, 1323년 토번(吐蕃)에 유적(流謫)되었던 충선왕이 방면·소환되고 이듬해 정월 충숙왕에게 국왕 인장이 다시 주어지자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충숙왕을 고소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심왕당의 세력이 수그러지고 그들이 추진하던 입성책동(立省策動)도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1328년 유청신·오잠(吳潛) 등이 충숙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하자 원나라 태정제(泰定帝)가 평장정사(平章政事) 매려(買驢)와 사인(舍人) 역특미실불화(亦忒迷失不花)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는데, 이때 박중인(朴仲仁) 등과 함께 매려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무고임이 밝혀지자 원나라로 돌아갔다. 1332년(충혜왕 2) 충숙왕이 복위하자 지밀직사(知密直事)가 되고 이듬해 심왕과 함께 충숙왕을 따라 귀국해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1338년(충숙왕 복위 7)에는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에 올랐다. 이듬해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 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로부터 충혜왕의 음란함을 듣고 이를 계기로 삼아 심왕 고를 옹립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국인을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 1,000여 명을 이끌고 충혜왕의 궁을 습격했으나 충혜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반격해오자 결국 패퇴, 경화공주의 처소로 숨었다가 추격해온 왕의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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