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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다른 표기 언어 靑華白磁

요약 중국 원대 중기에 처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된 것은 조선 초기로 짐작된다. 15세기경 청화백자에는 중국 명대의 문양과 기형 등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화백자로는 청화백자매조죽문호·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 등이 있다.
16세기에는 한국적인 성격이 강해져 회화적인 필치의 초화·포도·칠보 무늬 등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화 안료가 부족해 철화백자의 생산이 증가하는데, 이는 청화백자보다 거칠고 태토는 회백색을 띤다. 따라서 청화백자도 태토로 만들어지고 기벽이 얇아졌으며 송하인물무늬가 나타난다. 17세기 중반 이후 다시 청화백자가 증가하여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8~19세기 이후에는 감상용 자기로서 문양의 종류가 화훼·초충·산수·길상 등 다양해졌다.

중국에서는 청화(靑華)로, 일본에서는 청화(靑花)로 많이 쓴다.

청화백자

청화백자매조죽문호(조선 초기), 국보 제170호, 높이 1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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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청화백자와 관련하여 청화(靑花)·화자기(畵磁器)·화사기(畵沙器)·화기(花器)·화기(畵器) 등의 용어가 보인다. 현재는 '푸른색의 무늬'라는 의미에서 청화(靑華·靑畵·靑花) 등의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만당(晩唐)에서 송대(宋代)에 발생하여 원대(元代)에 발전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원대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원대 징더전[景德鎭] 가마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명(明)의 선덕연간(宣德年間:1426~35)·성화연간(成化年間:1465~87)에는 매우 우수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으며 이후 청대까지도 백자의 주류를 이루었다. 산화코발트 계열의 안료는 본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견되어 사용되었는데 서역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회청(回靑)·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렸으며, 한국에서도 청화백자 전래 초기에는 그렇게 불렸다.

한국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된 것은 조선 초기로 짐작되며 〈효종실록〉 6년(1655)에 태종이 고려의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있을 때 애용했던 청화잔(靑花盞)에 관한 기록이 있어 중국 원대의 청화백자가 적어도 고려말에는 한국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부터 회청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입안료의 구입난으로 세조 때 국산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사용하려는 시도를 했고, 〈예종실록〉에도 토청개발 및 시험번조에 관한 기사가 있으므로 이미 세조 이전에 번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경 청화백자는 주로 중국 명대 청화백자의 문양과 기형 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양질의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던 경기도 광주지역의 가마에서는 조선초부터 왕실에서 사용할 사기제조를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번조를 감독하고, 청화백자의 문양을 화원으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

이 시기의 청화백자가 발견되는 가마터로는 오전리(梧田里)·도마리(道馬里)·무갑리(武甲里)·관음리(觀音里)·도수리(陶水里) 요지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紋壺)·청화백자망우대명국충문(靑華白磁忘憂臺銘菊蟲紋)전접시·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紋壺) 등을 들 수 있다.

16세기에 들어서면 문양과 기형에서 중국적인 특징들이 차츰 사라지면서 한국적인 성격이 강해져 회화적인 필치의 초화무늬[草花紋]·포도무늬·칠보무늬 등이 나타난다. 17세기 전반경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제적 타격으로 청화 안료가 부족해 철화백자의 생산이 증가하는데 이들은 번조방법에 있어서도 청화백자보다 거칠고 태토 역시 회백색을 띤다.

따라서 청화백자도 회백색의 태토로 만들어지고 기벽이 얇아지는 현상을 보이며 송하인물무늬[松下人物紋]가 나타난다. 이러한 청화백자가 출토되는 곳으로는 무갑·관음·대쌍령(大雙嶺)·곤지암(昆池巖)·정지(亭支) 등이 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 다시 청화백자가 증가하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17세기말 신대리(新垈里) 가마터에서는 회백색 태토의 철화문이 그려진 백자들이 발견되었다.

1717~20년의 오향리(五香里) 가마에서는 담청을 띤 설백색 백자편과 각(角)이 있는 파편들이 발견되는데, 궁평리와 관음리에서는 신대리와 오향리 가마의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들 두 가마의 중간 시기에 놓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청화백자의 생산이 증가되었다는 것은 요업(窯業) 자체가 회복·안정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왕실전용 사기제조장이었던 분원이 왕실상납용뿐만 아니라 일반 판매를 목적으로 사사로이 번조하게 되는 것과도 상관이 있다.

18~19세기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고 갑발에 넣어 정교하게 구우면서 감상용 자기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제작방법에서도 여러 가능성이 시험되었으며 기물의 종류도 급격히 많아지고 이 가운데 문방구류의 증가는 특히 눈에 띈다. 이러한 사치풍조를 견제하려는 왕실의 노력이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으며 문양의 종류는 화훼(花卉)·초충(草蟲)·산수·길상(吉祥) 등 다양해지고, 청화안료의 사용범위도 단순히 문양을 그리는 것 이외에 다른 안료와 혼용하거나 채색을 하는 등 폭넓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초부터 고급기명이었던 청화백자는 조선 말기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일부 민간에서도 향유하게 되었다. 이 시기 청화백자들이 수습된 가마터로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금사리·분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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