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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2, 중국 쑤저우[蘇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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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1, 서울 |
국적 | 중국 |
요약
중국인 천주교 신부로는 최초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자수하고 순교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한 후 신부가 되었다. 1794년 당시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795년 서울 북촌의 최인길의 집에 도착하여 조선 최초로 성사를 집전했으며, 반년간 큰 어려움 없이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과거 천주교도였던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입국을 도왔던 윤유일·최인길·지황 등이 처형되었다. 피신 생활을 하면서 명도회라는 교리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직원들로 하여금 교리연구와 선교에 힘쓰도록 했다. 체포의 위험 속에서도 충청도 내포와 전라도 전주 등을 다니며 지방 선교활동을 했다. 1801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세례명은 야고보. 천주교 신부로는 최초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20세 되던 해에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했으며, 이후 독신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베이징[北京]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후 신부가 되었다. 1794년 당시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전담할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 23일 조선의 천주교 신자인 윤유일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했다.
이듬해인 1795년 서울 북촌(北村:지금의 桂洞)의 최인길의 집에 도착하여 조선에서는 최초로 성사를 집전했으며, 이후 반년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과거 천주교도였던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리자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의 입국사실과 입국경로 등이 조선정부에 알려지자 입국을 도왔던 윤유일·최인길·지황 등 3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었다.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여 생활하면서 명도회(明道會)라는 교리연구회를 조직하여 그 조직원들로 하여금 교리연구와 선교에 힘쓰도록 했다. 또한 당시 조선교회의 소식을 베이징 주교에게 알리는 한편 체포의 위험 속에서도 충청도 내포와 전라도 전주 등을 다니며 지방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강완숙에게 세례를 주고 여회장에 임명하여 여성들에 대한 선교를 담당하게 했다. 그뒤 그녀의 안내로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조선의 천주교도는 한때 1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자 많은 신도들이 체포되었다. 신도들이 탄압을 받자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하여 국경에까지 도착했으나, 마음을 바꾸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 1801년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했으며, 5월 3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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