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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사옥

다른 표기 언어 乙卯邪獄 동의어 을묘박해, 乙卯迫害

요약 을묘년(1795)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이른바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야기된 천주교박해.

을묘박해라고도 한다.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후에 최창현(崔昌顯)·최인길(崔仁吉) 등 중인계급이 선교사 영입운동을 전개해 1794년말 주문모 신부가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그의 입국사실과 거처가 관가에 알려지자 1795년 6월 27일(음력 5. 11) 포장 조규진이 포졸을 거느리고 그가 숨어 있던 최인길의 집을 급습했다. 그러나 미리 통고받은 주문모 신부가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므로 포졸들은 최인길 및 주 신부를 중국에서 인도해온 지황(池璜)과 윤유일(尹有一)을 체포했는데, 주 신부의 도피처를 추궁하다가 체포 다음날 세 사람 모두 장사(杖死)시켰다.

포청에서는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리고 이 사건을 은폐시키려 했으나 2개월 뒤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를 올려 세 사람을 일찍 죽게 해 주 신부를 놓친 포장의 죄를 물었으며 며칠 뒤에는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 등을 사학(邪學)의 교주로 고발하고 주문모 신부의 체포 실패 책임을 이 세 사람에게 전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실학자

ⓒ S0ch1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로 인해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으며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로써 서울에서의 을묘사옥은 일단락되었으나 지방에서의 박해는 더욱 심해져 경신년(1800)과 신유년(1801)의 박해로 발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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