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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성서는 종교교육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히브리 성서

ⓒ Knutux/wikipedia | Public Domain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계명을 가르치고, 계명을 신실하게 낭송하며, 계명으로 전신갑주를 입고, 계명을 문설주에 새겨야 한다. 가정은 이 성스러운 의무를 수행해야 할 1차적인 장소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공동체가 전문적인 교사들에게 의뢰하여 가정 교육을 강화하고 심화시켰다. 레위인들은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불렸다(II 역대 35 : 3). 바빌론 포로기(BC 6~5세기) 이후에는 하느님의 가르침(토라)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특별한 자격을 갖춘 학자 집단('율법학자들')이 등장했다.

제2성전파괴(AD 70) 이후 이 문서 전승에 속하는 학자·교사(랍비)들은 유대교의 생존을 보장하고 오늘날까지 유대교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요하난 벤 자카이(1세기에 활동)의 지도 아래 팔레스타인 야브네(얌니아)에 있던 랍비 학교는 제2성전의 파괴 이후 유대인들의 종교적·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형(兄) 가말리엘(1세기에 활동)은 〈신약성서〉에서 바울로의 스승으로 언급된다. 아키바(1~2세기에 활동)는 미슈나(토라에 대한 주석서인 〈탈무드〉의 일부)에 구전 율법을 성문화하기 위해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세기 또는 5세기에 걸쳐 랍비 주석가들에 의해 발전된 구전 율법의 편찬은 AD 220년경 완료되었다. 그뒤 한동안 랍비들은 미슈나에 대해 상세한 토론을 벌였다. 미슈나는 질문과 대답의 방법을 집중적으로 활용한 작품으로서 그뒤 게마라(미슈나 주석)를 탄생시킨 모체였다. 미슈나와 게마라는 함께 모아져 〈팔레스타인 탈무드〉(400경)와 〈바빌로니아 탈무드〉(500경)로 편찬되었다.

그뒤 〈탈무드〉는 유대교 종교교육에서 으뜸가는 역할을 했다. 각각의 〈탈무드〉는 그당시의 주요 랍비 학교에서 만들어졌고, 랍비 학교들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기관들과 함께 유대교 안에서 주석과 실천의 권위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랍비의 교육활동과 가정의 교육활동은 회당에서 서로 융합되었다.

또한 회당은 AD 70년에 제2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생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회당의 교육활동은 비교적 일찍부터 공식적인 지역공동체학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어린이가 공교육에 입학하는 입학식은 장엄한 의식이 되었다. 입학식은 어린이의 나이가 비교적 어릴 때, 모세가 율법을 전수받은 일을 기념하는 축일인 샤부오트 날에 주로 거행되었다. 어린이는 특별한 복장을 하고 회당으로 와서 십계명 낭독을 들었다.

그뒤 교사들은 꿀을 바른 과자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문자를 발음하면서 이 과자를 먹는데, 그것은 배움이 달콤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종교교육은 정신을 집중해야 할 과업이 되었으며, 다양한 본문들에 대한 면밀한 공부와 암기를 강조했다. 토라를 학습했다는 공식적인 증명서는 어린이들이 13세 되는 해에 거행되는 바르 미츠바(Bar Mitzwa : 축자적으로는 '계명들의 아들'이라는 뜻) 의식 때 받았다. 공식적인 종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년들과 성인 남자들뿐이었다.

성인 여자가 토라를 배우는 학생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여성이 교육에서 맡는 1차적인 역할은 신실한 어머니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교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토라 자체를 위해 토라를 연찬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연구 생활은 경건한 유대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훌륭한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랍비들의 지침이 회당과 부속학교들에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문을 배우는 아카데미(예시바)에도 부여되었다.

이 아카데미들은 탈무드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과 연구를 위한 중심지였다. 〈탈무드〉 토라라는 용어('토라 연구'라는 뜻)는 중세와 근대에 다양한 교육기관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유대인들이 게토로부터 해방되면서 유대교 종교교육에도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기간 공고하게 확립되어 있던 '토라 연찬'이라는 원칙과 실제는 이미 체계화되어 유대교 공동체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었으므로,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세속화된 근대 세계의 사상과 실제가 소개되면 유대교의 기반이 무너지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보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유대교 신앙과 의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세속화의 잠식을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18세기 계몽주의의 위대한 유대교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과 같은 사람들이 이끌었던 개혁 유대교는 세속화된 세계의 지적·제도적 현실에 유대교 교육과 전반적인 유대교 세계관을 적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랍비들의 훈련을 위해 신학교들이 세워졌고, 이들 학교에서는 고대의 방법과 현대의 방법, 고대의 견해와 현대의 견해를 놓고 중용을 취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30, 1940년대에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 사회를 사실상 뿌리뽑은 이래로,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에서는 고대의 교육원칙과 실제들 가운데 많은 것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많은 랍비와 교육자들은 세속화된 서구 세계에서 히브리어와 유대교 유산을 가르치는 새롭고도 실현가능성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줄곧 노력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와 파르시(Parsi)

조로아스터교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 가운데 5번째 의무는 '낮과 밤의 1/3을 신학교에 참석하여 성인들의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흔히 이들의 학교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선한 주'라는 뜻)에게 봉헌된 불이 있는 신전 구내에 있었고, 교사는 사제들이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거룩한 문서들에 대한 기계적 학습, 제의 훈련, 읽기와 쓰기법 전수, 준칙과 잠언을 이용한 도덕 교육 등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초급학교에서 시행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계급차별과 성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고등 교육은 주로 종교·의학·법학과 관련되어 있었다. 페르시아 서부에서 남자들은 군사적 종교교육 제도를 통해 이른바 '성전'(聖戰)에 대비했다. 교육제도로서의 조로아스터교는 최후의 조로아스터 왕조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었던 AD 651년까지 국가의 요구와 뒤얽혀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뒤 파르시(인도에 정착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도를 일컫는 용어)들은 서구의 세속 교육제도와 그들 나름의 전통 회복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리스도교

복음서들은 예수를 교사로 지칭할 때가 많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대부분 신앙과 의식에 관한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헌 가운데 가장 체계적인 것은 1세기 후반의 디다케 문서(Didache : '12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주의 가르침')인데, 이것은 신자들과 개종자들을 위한 훈련 및 교육 교범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개발된 가장 중요한 교육 수단은 교리문답이다.

개종자들은 도덕과 교리에 대한 공식적인 교육과 전례 훈련을 통해 준비했다. 전례 훈련은 신자들의 미사에 앞서 드리는 초신자들의 미사에서 이루어졌다. 개종자들은 교육을 만족스럽게 이수하고 도덕적 성품이 확립되고 세례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훈련된 교리문답 교사들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경~394경)와 같은 탁월한 초기 교회의 사상가들이 준비한 특별한 교리문답 교재들을 사용했다.

공식적인 종교교육은 주로 성인 개종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어린이들을 위한 종교교육은 가정의 책무로 생각되었다.

교리문답 교육은 '교리문답학교들'에서 고도의 세련성을 갖게 되었다. 교리문답학교들은 2세기 후반 도시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에게서 발전한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전성기 때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후의 에데사) 학파는 서로 각축을 벌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플라톤주의의 옹호자로서 관념론을 강조하고 성서 주석에서 알레고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는 데 반해, 안티오크 학파는 질료와 형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조점을 따르고 보다 축자적인 성서 주석의 입장을 따랐다. 교리문답학교들은 5~6세기에 쇠퇴했다. 중세교회에서 교육의 대상이었던 성례전의 초점은 세례에서 참회로 바뀌었고, 신앙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상징이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중세 교회는 문맹자들과 반(半)문맹자들에게 신앙을 전달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고대 전례의 화려한 장식, 축제와 축일의 정교화, 미술·건축·연극 등 예술을 활용했다.

중세 초기의 공식적인 종교교육은 주로 수도원과 대성당 학교에서 실시되었다. 샤를마뉴(800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와 그의 교육 보좌관 알비누스(732경~804경)의 지도하에 궁정학교 제도가 발전되어 8~9세기에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 학교에서 시행된 교육은 신앙의 초보지식에 관한 것이었지만 연구 주제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교리를 넘어서 어떤 경우에는 7대 교양과목(문법·수사학·변증법·대수·기하·천문학·음악 이론)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했다. 스콜라주의(11~15세기에 꽃핀 서방 그리스도교 철학 체계)가 발전하고 대학교들이 등장하면서 비판적이고 체계적인 사유가 개화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재발견에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1224/25~74)의 뒤를 따라 신학을 모든 학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학문의 여왕'으로 격상시켰다.

16, 17세기 종교개혁의 특징은 그리스도교의 맥락에서 도덕 교육과 일반 교육을 모두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모든 사람이 믿음 안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스로 성서를 지방어로 번역하고 교리문답서들을 마련하며, 예배와 교육을 촉진시키기 위해 음악을 널리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칼뱅(1509~64)도 모든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교리문답서 1권을 썼고, 학교의 설립을 장려했다. 이 두 사람의 추종자들은 가는 곳마다 종교 교육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초기 청교도(칼뱅파)들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1630) 지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대학(하버드)을 설립했고, 50가구 이상 되는 모든 지역공동체들이 공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가톨릭 종교개혁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교육의 발전은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1491~1556)와 그가 설립한 예수회(수도회)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고도로 훈련된 이 운동은 신앙과 교회를 위해 마음·몸·영혼 등 인간의 전인성을 다스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수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유례없는 종교교육 제도와 세속교육 제도를 발달시켰다.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교 교육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발전은 ① 국가의 지원이 있건 없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광범위한 교육 제도를 확립한 일, ② 모라비아교도, 독일 경건파, 퀘이커교도, 감리교도 같은 개신교 교단들이 머리 교육과 '마음 교육'을 강조한 일, ③ 특히 미국 개신교도들이 종교적 자극에 따라 교양학부를 설립한 일, ④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내에서 성직자 교육이 평신도 교육으로부터 점차 분리된 일, ⑤ 19~20세기에 대영제국과 미국에서 주일학교 운동이 전성기를 맞이한 일, ⑥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이 그리스도교 사상과 근대 세속 사상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 일, ⑦ 세속화된 서구 문화의 현실에 부응해서 그리스도교 교육의 방법과 내용을 조정하려고 노력한 일, ⑧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종교교육 운동이 존 듀이(1859~1952)의 교육 이론을 광범위하게 활용한 것 등이다.

이슬람교

무하마드(7세기 이슬람교를 창시한 인물)는 '중국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교육을 받으라고 추종자들에게 엄명했다고 전해진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쟁 포로들로 하여금 이슬람교도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대가로 자유를 얻게 해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들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이 2가지라고 보았다. 하나는 계시에 부응해서 각 사람을 도덕적으로 지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종교기관들을 운영할 수 있도록 문필 계급을 육성하는 것이다.

쿠타브(kuttab)는 이슬람 청년들을 위한 초급 교육기관으로 등장했다. 이 학교들이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기 위한 전형적인 필사(筆寫) 교과서로 사용한 것은 간결한 운문체와 산문체 준칙들이었다. 코란이 기록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란은 쿠타브 교육을 받는 저급 학년 학생들이 사용하는 유일한 교과서가 되었다. 일단 코란을 암기하고 읽기와 쓰기를 이수한 뒤에도(대부분 10세에 이를 마쳤음), 학생들은 15세까지 쿠타브 교육을 받았다.

이때 학생들이 공부한 교재로는 기본적인 하디스(Ḥadῑth : 예언자 무하마드의 언행 전승)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합당한 행동을 위한 지침서로 암기되었다. 쿠타브 외에 고등학문을 배우는 학교에서는 자격시험을 거친 학생들이 고전 아랍어 문법과 어원학 지식을 습득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코란과 하디스(이 둘을 모두 암기해야 했음), 그리고 이와 관련된 문헌들을 보다 심오하게 이해했다. 또한 학생들은 피크(Fiqh : 계시와 관습의 권위에 근거한 이슬람교 판결문 양식)를 논리학과 수사학 대신 공부했다.

피크에 대한 지식은 촌락 수준의 행정에서도 필요불가결했으므로, 피크에 대한 공부는 사회 전반에 비교적 널리 퍼져 있었다.

모든 이슬람 사원은 여러 가지 용도의 학교로 활용되었다. 사람들은 사원 뜨락에서 전승과 율법에 대해 토론했다. 어떤 사람이 권위자로 인정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집단을 형성했으며, 이같은 상황은 어느 정도 공식화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흔히 존경받는 대가 밑에서 배우기 위해 먼 곳까지 여행했다. 많은 이슬람 사원들은 도서관을 지어 대중이 이를 활용할 수 있게 해 대중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도서관은 이슬람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10만 권 이상의 장서를 가진 도서관들도 많이 있었다. 공식적인 모슬렘 사원학교들은 공인받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기관들의 교육에서는 살라츠(salats : 매일 여러 번 드리는 기도)가 지켜졌고, 많은 경우 학교마다 이맘(imam : '지도자')이 있었다.

일부 학교는 통상적인 이슬람 사원과 똑같은 외양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금요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로 갔다.

이슬람 사원학교의 이념은 니잠 알 물크가 바그다드에 국립 마드라사(이슬람대학교)의 문을 연 1066~67년에 더욱 촉진되었다. 얼마 뒤 이슬람 세계 전역에 이같은 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이 교육기관들의 본래 목적은 수니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표준화된 교육의 기초를 제공해서 그당시 영향력 있던 시아파가 종파의 교리를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그결과 이 교육기관들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수적 성향을 띤 고등학문의 중심지로서 논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에 유사한 대학교들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근대 이슬람 교육기관 가운데 지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카이로에 있는 알아자르대학교이다.

970년 시아파 군주들이 설립한 이 대학교는 몽골족이 침입하여 이란과 이라크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등학문 중심지들을 파괴한 13세기 이후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에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는 끊임없이 교육과 이해를 새롭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공식적인 학교들과는 별도로 여러 가지 형태의 교육이 발달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수피 수도회(이슬람 신비주의 형제단)들이다.

그러나 이슬람 교육의 정점은 마드라사이다. 마드라사에서는 이슬람 지식체계와 전승체계가 조직·전파되고, 헬레니즘 문화의 주요요소들이 유지되어 유럽 등 비이슬람교 문화권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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