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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

다른 표기 언어 丁夏祥
요약 테이블
출생 1795, 경기 양근
사망 1839,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정하상은 세례명은 바오로이고, 정약종의 아들이며 정약용의 조카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었고, 20세 때에 서울로 와서 박해로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모아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신유박해로 인해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처형된 후 한국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그는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앵베르 주교가 부임했고, 그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신학교육을 받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그해 8월 15일 처형되었다. 저서로 천주교 교리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상재상서>가 있는데 천주교가 유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가 아니라는 호교론적 논지를 펼쳤다. <상재상서>는 황사영의 <백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귀중한 자료이다.

세례명은 바오로. 약종의 아들이며 약용(若鏞)의 조카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었고, 20세 때에 서울로 와서 박해로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모아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신유박해로 인해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처형된 후 한국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정하상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현석문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우선 베이징[北京]의 주교에게 성직자를 보내주도록 요청하기 위해 9차례나 국경을 왕래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그는 교황에게 직접 청원문을 보내서 성직자를 보내주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정하상의 편지는 로마의 교황청에 전달되었고 마침내 1831년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베이징 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교회를 분리시켜서 조선교구의 설립을 선포했다. 그는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신학교육을 받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그해 8월 15일 유진길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저서로 천주교 교리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상재상서 上宰相書〉가 있는데 천주교가 유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가 아니라는 호교론적 논지를 펼쳤다. 〈상재상서〉는 황사영의 〈백서 帛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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