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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9(철종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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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6(건양 1)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후기의 관리.
본관은 온양. 자는 자화(子華), 호는 남고(南皐). 개화사상가인 유홍기(劉鴻基)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개화사상에 접했다.
1882년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을 시찰하러 갔을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1885년 박문국 회계주임, 이듬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를 지냈다. 1886년 서구의 농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하기 위한 농서인 〈농정촬요 農政撮要〉를 국한문체로 저술·간행했다. 1888년 밀양부사가 되었는데 재임중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고 〈밀주장정 密州章程〉이라는 향약을 만들었다. 1894년 7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농상공부협판이 되었다. 이듬해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어 왕실의 재정을 관리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학살하자 명성황후를 폐할 것을 주장하고 폐비조칙을 썼다. 1895년 11월 유길준·조희연(趙羲淵) 등이 고종에게 단발령 반포를 요구하며 먼저 시범으로 머리를 깎을 것을 주장하자 농상공부대신으로 있던 그가 고종의 머리를 깎았다.
1896년 2월 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김홍집·유길준 등과 함께 역적으로 규정되어 포살(捕殺) 명령이 내려졌다. 경무청에 구금되었다가 경무청 문 앞에서 순검들에 의해 참살(斬殺)되고 시신은 종로에 전시되어 군중들에 의해 찢겨졌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한 뒤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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