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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5년 1월 3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사상운동단체.
북성회의 해체와 일월회의 결성
1923년 이후 재일조선인 사회주의 운동은 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鍾範)·송봉우 등에 의해 조직된 사상운동단체인 북성회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러나 1923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실시된 북성회의 국내 순회강연을 기점으로 북성회의 지도 그룹들이 대거 귀국하여 국내에 북풍회를 조직하면서 국내운동에 주력하자 북성회는 약화되었다. 이에 일본에 잔류한 안광천·이여성(李如星)·하필원 등은 북성회를 해산하고 일월회를 결성했다.
일월회의 일본에서의 활동
일월회는 결성 직후 "대중본위의 신사회의 실현을 도(圖)함, 착취·압제에 대하여 계급적·성적·민족적 차이를 불구하고 민중과 같이 조직적으로 싸울 것, 엄정한 이론을 천명하며 민중운동에 자공할 것" 등 3개항의 강령을 발표했고, 조선 내의 각 사상단체에 대해서는 엄정한 중립을 표방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전선통일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편집부와 서무부를 두어 기관지인 〈사상운동〉과 〈대중신문〉을 발행했으며 월례연구회를 통해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사회과학 학습에 주력했다.
또한 재일조선인의 대중운동에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즉 이헌(李憲)·정희영·김상철 등 재일조선인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1925년 2월 재일본 조선노동운동의 지도기관으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조직한 것을 비롯하여, 삼월회, 도쿄 무산청년동맹회,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 조직을 지도했다.
일월회는 재일조선인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을 모색하여, 1925년 11월 관동조선무산계급단체협의회를 결성했고, 1926년 1월에는 삼월회, 도쿄 무산청년동맹회 등과 함께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등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월회의 활동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파쟁청산과 전조선적 단일 사상전선의 편성을 당면과제로 제시한 것이었다.
1925년 여름 국내에서 대수해가 발생했을 때 일본에서 모금운동을 전개한 일월회는 1926년 2월 안광천·김세연 등과 일본인 사회주의자 구로다[黑田壽男] 등을 국내에 파견했다. 이때 안광천 등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단체의 파쟁지양과 운동노선의 통일을 역설했다. 또한 북풍회가 도쿄에 조직한 사상운동단체인 신성회와 화요회 계열의 분파적인 도쿄 활동을 비판했다. 1926년 3월에는 '분립에서 통일에'라는 전단을 국내와 일본의 각 단체에 배포하여 사상단체의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정우회 가입과 일월회의 해체
안광천·하필원 등은 1926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2차례에 걸친 탄압으로 조직 기반이 크게 와해되어 있었다. 이에 이들은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사상운동단체인 정우회에 대대적으로 가입하여, 그해 11월 정우회의 조직 및 임원 개편을 통해 정우회를 장악했다.
정우회를 장악한 일월회 계열은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통해 "파벌투쟁의 청산과 사상단체의 통일, 대중의 조직화,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전환과 민족협동전선의 전개, 이론투쟁"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방향전환론을 제창했다. 이에 일본에 있던 일월회는 정우회선언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여 1926년 11월 18일 해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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