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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각이 된 단단한 표면을 그보다 부드러운 면에 눌러 찍어 흔적을 나타내는 인장에 관한 연구.
인장이란 인장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인장이 찍힌 자국을 뜻하기도 한다(금형). 인장학은 문서에 찍힌 인장이 그 문서의 신빙성을 입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에 도움이 되며 오늘날의 서명과 마찬가지로 문서가 진짜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쓰였다.
인장은 중세 때 청동이나 은이었고 17세기 이후에는 강철로 만들었다.
인장이 날인되는 인재(印材)로는 중세에는 녹색이나 붉은색 밀랍과 송진이 쓰였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셸락이 쓰였는데 현재도 쓰이고 있다. 중세의 헌장이나 증서는 공식인장이 찍혀야 진짜임이 증명되었다. 12세기에 이르자 문서를 접고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백랍인장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날인된 문서들은 14세기 영국에서 사람들의 신분과 가문을 입증하는 증표가 되었다.
문서에 찍혀 있는 인장들은 역사적인 관심을 끄는데, 특히 그 인장들의 시대와 그 문서의 진위(眞僞)를 확인함에 있어서 그러하다. 모형보다는 밀랍인장이 더욱 많이 남아 있으며 인장에 새겨진 그림들은 종종 그 시대의 의복·무기·도구·선박·건축 등을 연구하는 데 단서가 된다. 이집트에서는 인장으로 스카라베(풍뎅이형 부적)가 쓰이고 로마에서는 도장이 새겨진 반지가 쓰이긴 했지만 인장은 실린더나 스탬프였다.
왕과 집정관들뿐 아니라 유명한 남자와 여자들도 인장을 지니고 그것을 현대인들이 서명하는 것같이 사용했다. 밀랍인장은 짐과 항아리, 상자 등을 묶은 새끼줄의 매듭을 제3자가 건드리지 못하도록 고정시키는 데 쓰이기도 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기록된 문서가 소개되었을 때 그 문서들은 보통 점토판 위에 새겨진 것이었으며 점토가 굳어지기 전에 인장을 찍었다. 주로 계약서·보고서·편지 등인 문서판은 역시 인장이 찍힌 겉점토 '봉투'에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송신자의 신분을 확인시키고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 겉면에 그 사람의 인장을 찍었다. 왕실의 인장이 찍힌 국가간의 조약문서도 발견되었다. 이집트 사람의 문서는 여러 장의 파피루스를 풀로 붙인 다음 그 위에 글을 쓰고 둘둘 말아서 새끼줄로 묶은 것이었다. 매듭에는 밀랍으로 겉을 싼 다음 인장을 찍었다. 이러한 형태로 문서를 이용하는 방법이 이집트 밖으로 전해졌는데 그것을 통해 인장의 발달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인장은 특히 예술가의 관심을 끌며, 인장에 묘사된 것이 상당히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국가의 문화 발달을 더듬는 데도 도움이 된다.
명각(銘刻)이 있는 인장은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과 무역협상의 내막 및 계보에 관한 정보를 확인시켜준다.
중세 유럽의 인장은 고대 로마의 것과 마찬가지로 법정에서 사용되었다. 11~14세기에 인장의 사용은 더욱 널리 퍼져서 1400년경에는 적은 토지소유자도 이미 만들어놓은 금속인장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인장을 만드는 기교가 예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한 것은 13세기였으며 이 인장만을 만들던 장인들의 이름이 현재까지도 알려져 있다.
중세의 인장은 단일인장 또는 이중인장으로 되어 있었다.
즉 밀랍의 한 면이나 양면에 각인이 되어 있었다. 이중인장은 떼어내기가 어려워서 좀더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양면 날인은 인장을 양피지 조각이나 끈으로 문서에 달아서 첨부할 때만 가능했다. 인장은 문서에 매달거나 문서의 표면에 찍었는데 종종 그 소유자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영국정부의 성장 과정은 그 인장 사용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앉아 있는 군주와 왕실의 기장을 새긴 국새(國璽 Great Seal)는 11세기에 처음으로 쓰였는데 후에 보다 작은 인장들도 사용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옥새상서(玉璽尙書)를 보관하는 옥새(Privy Seal)가 첨가되었다.
인장의 힘이 커짐에 따라 국왕은 자신의 서신 왕래에 필요한 개인적이면서 때로는 공표되지 않은 인장을 채택하게 되었다. 왕실인장과 마찬가지로 종교계의 인장도 적절한 무늬가 있는데 그것들은 주교나 성인 또는 종교적인 장면을 새긴 것이었다. 수도원인장·시(市)인장·상업용인장·개인인장 등에서는 중세의 생활을 나타낸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글을 배우게 되면서 서명이 인장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늦게는 19세기까지도 봉함 편지봉투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편지를 봉하기 위해 사람들이 회중시계 주머니에 작은 인장을 넣고 다녔다.
서양에서는 인장을 연구하는 인장학도 발달되어 있다.
동양의 인장은 인재에 글씨·그림·문양을 조각하여 찍을 수 있도록 만든 신물(信物). 엽(鉩)·새(璽)·부절(符節)·육기(戮記)·보(寶)·기(記)·관방(關方)·도서(圖書)·도장(圖章) 등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사용자에 따라 어부인(御府印)·관인(官印)·사인(私印)으로 나뉘며, 각법(刻法)에 따라 양문(陽紋: 朱文)·음문(陰紋: 白文)으로 나뉜다.
인장의 역사는 중국 신석기시대의 도인(陶印)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봉니인(封泥印)이었으나 종이가 발명된 이후 압인(押印)으로 대체되자 인면(印面)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장은 주인의 권위와 품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면의 인문 배치와 각법이 중요시되어 인장과 전각(篆刻)과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루며 발전했다. 그결과 명·청대에 이르러 시·서·화와 같은 예술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에 인장에 관한 기록이 있고, 안압지에서도 굵게 음각된 세로 6.2㎝, 가로 6.3㎝의 목인(木印)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익종 때 인부랑(印符郞)을 두어 관인을 관장하도록 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폐기되어 현존하는 것은 모두 사인이다.
대부분 청동인이고 청자로 된 도인이 약간 전해지고 있다. 인문은 방사선식으로 배열된 구첩전(九疊篆)이 많고 때로 문자가 아닌 것도 있어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러나 정교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뉴(鈕)의 다양함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의 관인은 상서원(尙瑞院)에서 관장했는데, 전하는 것은 모두 방형 혹은 장방형의 동인(銅印)이나 철인(鐵印)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인이 일반화되어 사구인·수장인·감정인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고 18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에서 금석학과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뒤 더욱 크게 발전했다.→ 낙관, 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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