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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로스

다른 표기 언어 Epeiros

요약 그리스 북서부와 알바니아 남부의 해안지역.
(그). Epeiros. (라). Epirus.

북서쪽으로 알바니아의 발로나 만(그지이블로러스)에서부터 남동쪽으로 아르타 만까지 뻗어 있으며, 내륙지역은 동쪽으로 핀두스 산맥의 분수령까지 뻗어 있다.

이피로스의 그리스 지역은 아르타·이오안니나·프레베자·테스프로티아 4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핀두스 산맥이 이피로스와 동쪽에 있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및 테살리아 지방을 가르고 있다. 그리스령 이피로스의 최대 취락은 그리로카스터드이다.

주로 남동-북서 방향과 남북 방향으로 뻗은 거대한 석회암 능선들로 이루어졌으며, 최고 2,600m의 높이인 이 능선들은 서쪽으로 보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능선들은 대체로 해안선과 평행으로 달리는데 경사가 워낙 급하여 그 사이의 골짜기는 목장으로나 이용하기에 적합하다. 다만 이피로스의 북부에서는 어느 정도의 평야가 있어 곡물을 생산된다. 이피로스의 많은 지역이 핀두스 산맥의 바람맞이 쪽에 있는 관계로 이오니아 해에서 불어오는 탁월풍(卓越風)을 받기 때문에 그리스 본토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강우량을 기록한다.

척박한 토양, 결함이 많은 영농방식, 토지의 분할 소유가 이 지역의 농업 생산성을 낮은 수준에 머물게 했다.

양과 염소가 사육되며, 옥수수가 주된 작물이다. 올리브와 오렌지도 재배되고, 이오안니나 주위에는 연초 재배지가 있다. 낙농업과 어업도 약간 행해지며, 밀과 채소는 수입하고 있다. 자원이 빈약하고 산업발전이 부진한 이피로스는 타지로 떠나는 사람이 많아 인구가 감소해왔다. 주민은 제조업체의 수가 가장 많은 이오안니나 일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신석기시대에 산사람들이 이피로스의 해안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 그밖의 지역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남부에서 그리스어와 함께 들어온 목양자와 사냥꾼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수혈묘(竪穴墓)에 매장하고 그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았다. 그와 비슷한 묘실이 후에 미케네 사회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미케네의 건설자들이 이피로스와 알바니아 중부 지방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기에 이피로스 자체는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지만, 이 지역에 있는 아주 오래된 2개의 신전에서 미케네 문명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에 등장하는 영웅들에게 익히 알려진 아케론 강변의 사자(死者)의 신탁소(神託所)와 〈일리아스 Iliad〉에서 아킬레스가 기도를 드린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의 신탁소가 그것이다. 미케네 문명이 쇠퇴한 후 이피로스는 도리스족의 그리스 침입(BC 1100~1000)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도리스족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났으며, 잇따른 이민의 물결 중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3대 부족 집단이 이곳에 정착했다. 3대 부족 집단은 이피로스의 남서부를 차지한 데스프로티 부족, 중부의 몰로시 부족, 북서부의 카오네스 부족이었는데, 다른 대부분의 그리스인이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거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BC 5세기에도 이피로스는 여전히 그리스 세계의 변방으로 머물렀다.

BC 5세기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눈에 비친 이곳 주민들은 '야만인들'이었다. 그리스인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이피로스인들은 몰로시 왕가(王家)의 일족이며, 아킬레스의 후손임을 주장한 아이아키다이가(家)였다. BC 370년경부터 아이아키다이가는 경쟁 집단의 부족들을 통합함으로써 몰로시족의 국가를 넓힐 수 있었다. 아이아키다이가의 노력은 그들의 공주 올림피아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결혼함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다.

BC 334년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 사이에 난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로 건너가 있는 동안 그의 삼촌인 몰로시국의 통치자 알렉산드로스는 남부 이탈리아를 공격했다. 그는 결국 로마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BC 331년경에 전사했다. 몰로시국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이피로스의 부족들은 동등한 자격으로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는 몰로시국의 왕을 추대했다. 이 연합을 이끈 가장 위대한 몰로시 왕은 피로스(BC 318~272 재위)였으며, 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영토를 남쪽으로는 아카르나니아, 북쪽으로는 알바니아 중부까지 넓혔다.

피로스의 여러 차례의 군사원정은 그 나라의 군사 자원을 피폐시켰지만 이피로스에 큰 번영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도도나에 웅장한 석조 극장을 세웠으며, 암브라키아(지금의 아르타)에 새로운 교회 주거지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아이아키다이 왕조가 BC 232년에 끝난 후 이피로스의 동맹은 부족 연합으로부터 연방국가로 바뀌었는데, 그것이 의회(시네드리온) 체제의 이피로스 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로마와 마케도니아가 대립하는 동안 불안정했으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BC 171~168)중에는 분열하여 몰로시족은 마케도니아를 지지하고 카오네스족과 테스프로티족은 로마 편을 들었다(로마사). 몰로시는 BC 167년 승전한 로마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15만 명의 주민은 노예가 되었다.

이피로스의 중부지방은 비잔틴 시대가 될 때까지 과거의 번영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해안지역들은 로마 속주의 일부로서 계속 번영을 누렸다.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했을 때 이피로스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주였다. 1204년 이후 비잔틴 제국이 사분오열될 때 이피로스에는 하나의 독립왕국(→ 에피루스 공국)이 존속했지만, 1318년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이 이 지역을 유린하고, 1430년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이곳을 병합했다.

투르크의 지배하에서 이 지역은 과도한 경작과 산림 벌채의 대상지가 되었으며, 그결과 토양의 침식이 일어나고 인구가 감소했다. 18세기에는 이피로스에 대한 투르크의 지배권을 투르크-알바니아의 한 독재자 알리 파샤 테펠레네가 위협했으며, 투르크는 1778년에 그를 이오안니나의 파샤(지방의 통치권을 지닌 大官의 칭호)로 인정했다. 그의 억압적인 통치는 1810년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 지역과 중부 그리스 및 서(西)마케도니아의 여러 지역까지 확산되어 그리스 독립전쟁(1821~29)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피로스 북부의 많은 지역이 1913년 그리스에 통합되었으며, 그리스와 알바니아 국경의 양쪽에는 소수 종족들이 거주하는 지역만이 남았다.

1939년 이탈리아가 알바니아 전체를 병합했지만, 1940년 그리스 침공을 시도하다가 그리스군에 의해 그리스의 이피로스로부터 밀려나 이피로스 북부의 많은 지역을 상실했다. 그후 독일이 그리스를 공격하여(1940~44) 점령했으며, 나중에 연합군이 그리스와 알바니아의 국경을 원상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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