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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0(고종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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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8 |
국적 | 한말, 한국 |
요약 조선 후기의 친일파·민족반역자.
을사5적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은용(垠鎔). 자는 경천(景川), 호는 향운(響雲). 아버지는 예조판서 재긍(載兢)이다. 고종의 종질(從姪)이다.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쳤고, 1895년 고종의 명으로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898년 황해도관찰사, 이듬해 경상도관찰사, 1900년 궁내부협판 등을 역임했다. 1901년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서리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조인했으며 그해 3월 일본에 보빙대사로 가서 일제의 훈장인 훈 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귀국하여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지냈다.
1905년 특명대사로 다시 일본에 가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그해 11월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함으로써 을사5적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민중에 의해 집이 소각당했다. 처인 이옥경(李鈺卿)도 친일부인단체인 한일부인회(韓日婦人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1907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았다.
이후 귀족의 체면에 관한 사건으로 예우의 정지처분을 받았다가 1915년 예우가 회복되었다.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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