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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미학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한 최초의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Studio〉(1854~55,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거절당하자, 그는 특별히 지은 가설 천막에 '사실주의, G.쿠르베'라는 이름을 달고 이 작품과 함께 여러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이상화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고, 평범하고 동시대적인 것에 예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그는 일상생활상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앞서 1850~51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던 〈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1849, 루브르 박물관)과 〈돌 깨는 사람들 Stone Breakers〉(1849, 이탈리아 밀라노, 개인 소장)은 검소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꾸밈 없이 사실대로 묘사하여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쿠르베가 농부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대담하고 거칠게 제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미술계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제와 표현 양식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닦아놓은 터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장 프랑수아 밀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 지방의 특징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프랑스 바르비종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었지만 자연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측면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측면을 강조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처럼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들 The Winnower〉(1848) 같은 작품에서 농부들을 위엄있고 장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때까지 중요한 인물들을 묘사할 때만 사용했던 모습을 보잘것없는 서민에게도 적용한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주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로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풍자화한 전형적인 도시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노동계층의 남녀, 비열한 변호사, 사악한 정치가 들을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 그 역시 쿠르베처럼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풍자 화가의 명분을 정치적 목적에 직접 활용했다. 도미에는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과 추악함을 힘찬 윤곽선, 대담하게 강조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 거의 조각 같은 형태 처리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판했다.
미술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프랑스 이외에 19세기 미국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윈슬로 호머의 바다를 주제로 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그림들, 토머스 에이킨스의 초상화와 뱃놀이 광경 등은 당시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며 정확하게 관찰한 그림들이다.
사실주의란 20세기 미술의 뚜렷한 흐름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 대해 좀더 정직하고 예리하며 대상을 이상화시키지 않는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욕망과, 이 미술을 사회·정치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8인회'(The Eight)라 불리는 미국 화가들은 도시생활의 어두운 면을 신문 기자처럼 신랄하게 묘사한 풍경화를 그렸고, 한편 독일의 미술운동인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의 냉소적인 사고방식과 환멸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사회사실주의라 부르는 대공황기의 미술 운동도 그당시 미국 사회의 불공평과 해악을 가혹하고 노골적인 사실주의로 묘사했다. 1930년대초부터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삶을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주의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함'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선전의 필요성과 일치해야 했고,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했다.
이런 그림에 묘사된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영웅적인 적극성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사실주의는 통칭 '구상'이라는 용어와 동일시되어왔다. 이는 서구의 아카데미 사실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입되어 미술교육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사실상 구상적인 미술 전체가 이러한 아카데미 사실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카데미 사실화란, 사실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면서 시민계층의 삶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찬미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던 서구 사실주의 미술이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보다 아카데미적이며 관습적·상업적인 '부르주아 사실주의'로 변화해간 것을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미 관례화된 주제(풍경·정물·누드·인물) 시각에 대한 기법적인 혹은 감각적인 변용에 그쳤고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인상파의 한 갈래인 양식과 혼재되어 형성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묘사중심의 회화를 형성했지만 기본적으로 피상적 수준에서의 현실재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서구의 아카데미즘적인 사실주의 화풍을 직접적으로 들여온 화가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리에서 유학했던 이종우였으며 이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한 양식으로 굳어졌다. 주요작가로는 이종우·김인승·심형구·김창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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