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이익은 종족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에서 점차 문화 중심의 화이론으로 전이(轉移)되고 있었던 17세기 후반의 역사사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켰다. 그는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면서 모든 나라는 중국 중심의 '천하'(天下)에 소속된 존재가 아니라 각기 하나의 독자적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고 인식하여, 중국 중심의 '천하'사상을 부정했다. 종래에는 중국 중심의 '천하'가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서의 유일한 '천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중국에서만 '정통'(正統)이 있었는데, 이제 조선이 분절화된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역사적 세계'이기에, 조선에도 '정통론'이 적용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었다. 따라서 그는 조선 사람이 〈동국통감〉은 읽지 않고 중국의 사서(史書)만 읽으며, 중국 사서의 조선 기사로써 조선 역사를 저술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사대주의적 역사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또 종래 외이(外夷)라 하여 멸시했던 요(遼)·금·원(元)에도 예악(禮樂)이 갖추어져 있고, 거기에서도 성인(聖人)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여 전통적인 화이론을 크게 부정했다. 이처럼 조선을 비롯한 각 개별국가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힘으로써 민족의식의 싹을 틔웠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운동이 선승악패(善勝惡敗)의 도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세(時勢)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했다. 이처럼 시세가 역사를 움직이는 기본적 동력이므로, 역사상의 각 시대는 각기 고유한 특징을 가진다고 파악되었다. 시세는 어떠한 형태의 법칙도 없이, 그리고 인간의 주체적 의지나 행위에 관계없이 전혀 우연적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파악되었다. 따라서 역사 사실에의 의미부여의 영역에서는 다시 도덕률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가 비록 역사학을 유교적 도덕률에서 완전히 자립화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확립시키지 못했으나 민족의식의 싹을 틔우고, 근대적 역사학을 일단 출발시킴으로써, 한국에서 근대적 역사인식을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성호집속록〉·〈성호사설〉·〈곽우록 藿憂錄〉 등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