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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4(철종 5), 함북 명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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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7(융희 1) |
국적 | 한국 |
요약
대한제국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중심인물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을 제수받았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887년 광무국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탁지부대신 겸 육군참장으로서 조선의 국외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압송,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소학교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나 1907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죽었다.
대한제국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중심인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 아버지는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이다. 선대는 무과출신으로 양반신분에 속했지만 중앙정계의 문신관료에 비하면 한미한 집안이었다. 5~14세에는 서당에서 공부했고 20세까지 주자학자인 초병덕(楚秉悳)에게 사사했다. 이후 고향을 떠나 보부상·물장수로 전전하다 금광에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민비(閔妃)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閔泳翊)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監役)을 제수받았다.
1883년 단천부사, 1885년 북청부사, 1887년 영흥부사에 이어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때 단천 및 영흥에서 사금을 채굴해 이를 고종에게 바쳐 크게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1888년 불법적인 수탈로 인해 북청민란이 일어나자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서 파면되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함경남도병마사·강계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894년까지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896년 평안북도관찰사 재임시 민란이 일어나 다시 유배되었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제부금광사무감독(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기에 이르렀고, 1898년에는 궁내부 소속 광산감독사무가 되어 왕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7년 전환국장이 되어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여 그 이익을 국가재정에 충당했으나 그결과 물가앙등과 화폐가치의 하락을 가져와 유통경제를 혼란시키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제일은행권의 통용을 저지하기 위해 1903년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 兌換金卷條例〉 등을 반포하여 독자적인 지폐발행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899년 내장사장(內藏司長)을 거쳐 1904년까지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임하며 대한제국기 왕실재정 강화에 노력했다.
즉 각 도에 광산감리를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게 하고, 외국인의 잠채(潛採)를 금하고 광세(鑛稅)를 징수하는 등 광산경영에 힘썼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역토(驛土)·둔토(屯土) 등 국가소유 토지를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捧稅官)을 파견하여 도조(賭租)의 징수를 강화했다. 그밖에 홍삼을 제조하는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홍삼의 제조 및 판매를 관장하며 전매했으며, 수륜(水輪) 잡세 등도 관리하여 왕실재정을 증가시켰다.
1898년 철도사(鐵道司)를 설립하여 감독을 맡고 서울-목포, 원산-진남포, 경흥-의주 간 철도부설을 계획했으며,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자 서북철도감독을 맡아 경의선·경원선 부설을 추진했다.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토지소유자에게 지계를 발행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법인(法認)하는 지계사업과 양전사업을 담당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탁지부대신 겸 육군참장으로서 조선의 국외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압송,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보성고등학교). 이후 경상북도관찰사·제실회계심사국장·군부대신 등에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했으나 일본의 공작에 의해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비밀리에 출국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 중국 산둥 성[山東省]에서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고 조선정부는 그의 공직을 파면해 버렸다. 그뒤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나 1907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죽었다.
그가 추진한 역둔토 조사와 지주경영은 농민들의 항조운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왕실재정의 일방적인 확대는 국가재정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으며 집권관료층 내부에서도 그의 탐학과 횡포에 대한 성토가 계속되었다. 비록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그는 왕권강화를 기초로 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 등 열강의 보장하에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노선을 갖고 있던 지사(志士)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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