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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84(선조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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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47(인조 25)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문풍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정구·신흠·장유와 더불어 한문4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으며, 여한9대가(麗韓九大家)로도 꼽혔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행(荇)의 현손이며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여러 번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뒤 대사헌, 형조·이조·예조 판서를 지냈다.
문장의 짜임새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았고, 고문다운 문장이란 한문이 지닌 표현능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간결하고도 품격이 높고 꾸미지 않은 것 같은 데서 우아한 흥취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5언율시를 가장 잘 썼다. 소설배격론이 대두되었을 때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풍을 바로잡는 책임을 절감하며 소설의 폐단을 강경하게 지적하고 허균을 공격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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