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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45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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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439. 9. 7(?), 아르메니아 아쉬티샤트 |
요약
축일은 사순절 두 주일 전과 7월초. 아르메니아 사도(정)교회의 유명한 가톨리코스(catholicos), 즉 영적 지도자.
(아르). Sahak.
아르메니아 문화와 교회의 독립을 앞장서서 주장했고, 성서와 여러 그리스도교 문학을 최초로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들의 가문에서 태어나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의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내가 죽자 수사가 되었고, 388년경 왕실의 지지에 힘입어 아르메니아 가톨리코스로 임명되었다.
아르메니아 방식의 수도원제도를 발전시켰고, 자기 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조한 뒤 수사들과 금욕생활을 하면서 총대주교의 직위를 수행했다. 개혁자였던 그는 성직자들에 대한 훈련을 강화했고, 아르메니아 주교들에게 독신을 의무화했다.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의 권리들을 승인받았으며, 이로써 그리스 정교회의 통제를 벗어난 독특하고 자율적인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를 세웠다. 자신의 보좌주교이자 훗날 성인으로 추증된 수사 메스로프(마시토츠)의 도움으로 391년경 그리스어를 본뜬 아르메니아 문자와 문학을 발전시켰다. 그뒤 이 두 사람은 학자들을 이끌고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성서를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435년경에 완성했다. 이러한 업적과 아르메니아 전례와 의식 제정에 힘입어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분할되어 있던 동안 통일을 유지했다.
이사크는 페르시아 군주들에게 아르메니아 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428년경 아르메니아 영주들 사이에서 생긴 음모사건 때문에 직위해제를 당했다. 432년 민중의 요청에 힘입어 다시 교회지도자가 되었다. 전설에 가까운 8세기 아르메니아 위인사(偉人史)에 따르면 이사크는 전례서들과 전례음악, 〈구약성서〉 주석들, 그리고 비잔틴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로클루스 및 그외 동방 고위성직자들에게 보낸 그리스도론 논쟁에 관한 편지들을 썼다고 한다.
435년 아쉬티샤트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전국 교회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정교회 교리를 옹호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루스의 주장을 단죄했다. 이삭이 남긴 편지들은 8세기 아르메니아 위인사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본(1841)에 실려 출판되었다. 1898년 프리드리히 C. 코니베어는 이사크가 쓴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적인 권위를 지닌 교회법을 영어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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