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아르메니아의 정통 국교회.
사도 바르톨로메오와 타대오가 아르메니아에 복음을 전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사도 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교가 아르메니아 국교가 된 것은 계시자 성 그레고리우스가 아르사키드 왕 티리다테스 3세를 개종시킨 300년경의 일이다. 새 아르메니아 교회는 성서, 전례, 기본적인 제도상의 용어를 제공해준 시리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했지만,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에 있는 모교회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메니아 교회가 시리아 문자를 빌려 써 온 것을 중단한 것은 성 메스로프가 아르메니아 문자를 만들고 수차례에 걸쳐 성서를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해낸 5세기의 일이다.
506년 드빈 공의회에서 아르메니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2개의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칼케돈 공의회(451)의 결정을 반대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 교회는 그리스도가 오직 '1가지 본성'만 가졌다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이 되었고, 그후로도 그 입장을 견지했다. 7세기에 조지아 교회가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분리되어 그리스 정교회와 재연합했을 때 아르메니아 교회는 '말씀이 육신이 된 1가지 본성'을 주장한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의 그리스도론 진술을 고백하는 콥트와 시리아 야코부스파 교회와 교제했다.
계시자 성 그레고리우스와 그를 계승한 처음 몇 사람은 에크미아드진에 관구를 두었다.
이 관구는 485~927년에는 드빈으로 옮겨졌으며, 그뒤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가 1293년에는 가톨리코스 관구(교회 최고행정부)를 실리시아의 수도 시스로 옮겼다. 이 관구는 실리시아가 이집트의 이슬람교도 맘루크파에 함락되고 난 다음에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 15세기에 그레고리우스 9세 무사베기아누스는 가톨리코스 관구를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두기 위해 아르메니아 동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주교로 구성된 교회회의는 그를 폐위했고, 수사 키라코스가 1441년 에크미아드진에서 가톨리코스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의 가톨리코스'라는 칭호를 지닌 총대주교들의 오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 가톨리코스가 2명이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중 하나는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의 최고 가톨리코스로서 에크미아드진에 관구를 두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시스의 가톨리코스로서 현재 레바논 안틸리아스에 관구를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 전체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되는 사람은 에크미아드진에 있는 가톨리코스이며, 시스에 있는 가톨리코스는 행정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에크미아드진 가톨리코스에게 충성을 바친다.
두 가톨리코스는 때로 정치적인 갈등 때문에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최고 가톨리코스는 아르메니아에 있지만,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타슈나크파)은 안틸리아스 가톨리코스를 지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열은 북아메리카 아르메니아인들에게서도 반영된다.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있는 2명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들은 비교적 뒤늦게 생겼으며, 에크미아드진의 수위권을 인정한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일반적으로 단성론적인 질문을 제외한 동방 정교회의 신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교회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교회를 아르메니아의 민족 동일성의 수호자로 본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