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중앙의 사직에 해당하며, 생산의 풍요를 위해 수재나 한재를 겪지 않도록 비는 것뿐만 아니라 전염병을 피할 수 있도록 비는 마을 수호신의 역할도 했다. 대체로 무일을 택하여 사직에 제사 지내는데, 산림·천택·구릉·분연·원습마다 제사를 지내 백곡의 풍작을 기원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은 중앙에서 종묘와 사직을 제도화했듯이 향촌사회에서는 가묘와 이사제를 시행했다. 이사제 시행 주장의 배경에는 촌락의 성장이 있었다. 이사제는 마을의 토신을 모시는 종교행사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사제를 중심으로 마을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국가가 주관하고 향촌민을 참여시켜 관과 민이 함께 제사지내자는 것이다. 중앙정부는 이사제를 관 주도로 운용함으로써 또 다른 방식으로 향촌을 통치하고자 했다.
중앙의 사직에 해당하며 단지 생산의 풍요를 위해 수재나 한재를 겪지 않도록 비는 것뿐만 아니라 전염병을 피할 수 있도록 비는 일종의 마을 수호신으로서의 구실도 했다. 허목(許穆)에 의하면 천자는 태사(泰社), 제후(諸侯)는 후사(侯社)라 했으며 대부 이하는 군(群)이 되면 모두 사를 설치했는데 100집이 군이 되므로 이사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보면 사(社)는 여러 단위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25가를 단위로 하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사는 말 그대로 마을의 제사를 의미한다.
대체로 무일(戊日)을 택하여 사직에 제사 지내는데, 산림·천택(川澤)·구릉·분연(墳衍)·원습(原濕)마다 제사를 지내 백곡(百穀)의 풍작을 기원했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사직에 제사 지내는 날 이듬해의 농사에 대한 것을 점치는데 이것은 어떤 농작물이 적당한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유교윤리와 명분에 어긋나는 신앙이나 종교를 음사로 규정하고 중국의 사전(祀典)을 본떠 오악(五岳)치제와 같은 국사(國祀)체제를 정비하여 가묘제(家廟制)와 이사제(里社制)를 수용하려 했다. 중앙에서 종묘와 사직을 제도화하듯이 향촌사회에서는 가묘와 이사제를 시행했다. 이와 같은 음사정리가 진행되면서 마을 단위로 행하던 향도의 사신행위도 이사제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허지(許遲)는 40~50호 정도를 단위로 이사법(里社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사제 시행의 주장 배경에는 촌락의 성장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향촌사회는 대체로 아직 자연촌의 성장이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한 향촌사회에서 기불(祀佛) 단체인 동시에 향촌공동체였던 사신향도가 신당(神堂)을 매개로 하는 사신행위의 중심기구가 되었다. 자연촌들이 성장하여 이라는 독자적인 명칭을 갖게 되면서 이사제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고려 후기 향촌구성원의 변동에 따른 촌락사회의 변화와 촌락성장의 결과였다. 본래 이러한 이사제가 마을의 토신을 모시는 종교행사로서의 의미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이사제를 중심으로 마을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국가가 주관하고 향촌민을 참여시켜 관과 민이 함께 제사지내자는 것이다. 중앙정부는 이사제를 관 주도로 운용함으로써 또 다른 방식으로 향촌을 통치하고자 했다. 유교적 가부장제 원리의 확산은 물론 향촌사회를 동일한 제사에 묶어 국가 주도의 향촌사회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사의 설치가 보편화되지는 않은 듯하다. 허목의 이사제 시행은 향촌사회의 여러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향약을 규정하고 이사를 설치하며 제사 일을 마칠 때마다 온 마을이 다 모여, 나이 순으로 돌려가며 술을 마시고 신(信)을 닦으며 화목을 도모하는 향음주례를 행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원시/무속신앙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