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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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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사우건립은 주자학의 이념에 입각한 향촌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조선건국 후 전국적으로 사전 정비를 단행했으며, 사대부가는 가묘 설치를 의무화하고, 향촌에서는 무속·불교적 제사를 음사로 규정하여 배격하고 대신 수령과 재지사족의 주도로 이사를 세워 제사와 각종 교화정책을 실시하게 했다. 이후 사우가 대폭 증설되고 제향하는 인물도 변했다. 한편 서원에도 교육기능과 함께 선현을 봉사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제향은 유학에 공이 큰 문신이나 학자를 제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서원과 사우의 개념이 혼용되었다. 그결과 서원과 사우는 구별이 없어지거나 사원으로 통칭되고 사우건립이 증가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많은 사우가 함께 철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상숭배·민간신앙과도 결합하여 시조나 국가적 영웅, 산천신을 제사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이중 일부에서는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제사하기도 했다.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사우건립은 주자학의 이념에 입각한 향촌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즉 이전과 달리 일반민에게까지 주자학의 이념과 윤리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며 일상 의례에서도 불교와 음사(淫祀)를 배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조선건국 후 전국적으로 사전(祀典) 정비를 단행했으며, 사대부가는 가묘(家廟) 설치를 의무화하는 한편, 향촌에서는 기존의 무속·불교적 제사를 음사로 규정하여 배격하고 대신 수령과 재지사족의 주도로 이사(里祠)를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제사와 각종 교화정책을 실시하게 했다. 이후로 사우가 대폭 증설되고 제향하는 인물도 변했다. 이전에는 김유신과 같은 국가적 영웅이 주로 제향되었다면, 이후에는 그 지역 출신이나 관련인물 혹은 귀양왔던 명신이나 충의지사, 그 지역에 공이 있거나 절개·효행 등으로 지역주민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제향하는 것이 유행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과 교화의 상징인 기자(箕子)를 제향하는 사우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지역과 관련된 마땅한 중앙관료나 유학자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공자(孔子)나 주자(朱子) 같은 중국인물을 제향하기도 했다. 명칭도 다양해져서 향현사(鄕賢祠)·향사(鄕祠)·사(祠)·이사·영당(影堂) 등으로 불렸다. 이외에도 기존에 제향된 사람과 관계 깊은 인물을 별도로 제향하는 별묘(別廟), 일족의 선조의 위패를 배열하는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성종대 이후로 지방민이 치적이 훌륭한 감사나 수령을 제향하는 것이 허용되면서 살아 있는 인물들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과 유애사(遺愛祠)도 증가했다.

한편 서원에도 교육기능과 함께 선현을 봉사(奉祀)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제향은 학생교육에 부수된 것으로 향촌민 전체가 아닌 학생을 대상으로 하며, 유학에 공이 큰 문신이나 학자를 제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서원과 함께 사우가 남설되면서 서원과 사우의 개념이 혼용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조선 후기에 정쟁(政爭)이 격화하면서 지역양반층도 크게 분열하게 된다. 또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신흥양반층이 증가함에 따라 향권을 둘러싼 양반층 내부의 대립도 깊어지고, 이들간에 혹은 평민층에 대해 가문이나 집단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서원은 양반층의 경제적 특권과 피역(避役) 수단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서원은 지방양반층이 정파·학파·문벌에 따라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고, 교육적 기능보다도 서원의 배향인물이 서로간에 권위를 비교하는 척도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제향이 서원을 건립하는 목적이 되기도 했다.

그결과 서원과 사우는 용어상으로도 구별이 없어지거나 사원(祠院)으로 통칭되고 사우건립이 증가했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충렬지사의 사당을 건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족친이나 유생들이 결속, 건립하여 선조나 학파·정파의 인물을 제향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지역과의 사소한 연관성을 내세우거나 하등 관계가 없는 인물을 제향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후로 사우도 서원과 같이 사액되고 사우가 서원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았으며, 강당도 없이 사실상 사우만을 지어놓고 서원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서원·사우라는 명칭은 다만 제향하는 인물의 위상에 따라서 구별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서원이 사우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같은 사우는 서원남설과 함께 조선 후기 사회의 큰 폐단이 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많은 사우가 함께 철거되었다.→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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