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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문학은 그리스어로 된 종교 서적을 번역하기 위해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2세기부터 세르비아 문학은 독특한 특징을 갖추어 채식본인 미로슬라브 복음서나 성서 이야기, 성자전, 특히 세르비아의 수호 성인인 성 사바의 일대기, 그리고 발람이나 요사밧의 이야기 등이 나타났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1459년 투르크에 점령된 뒤 세르비아 문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세르비아인은 도시톄 오브라도비치로서, 그의 글은 세르비아의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20~70년의 문학에서는 유럽 낭만주의의 특징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민간 전승에 대한 예찬과 민족주의적 주장은 이 시기 문학의 뚜렷한 특징이다. 중심인물은 세르비아어 문법책과 사전을 편찬해 문어를 개혁하고 민간 전승의 시가와 이야기를 모은 부크 스테파노비치 카라드지치였다.
몬테네그로의 통치자이자 시인인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 녜고슈의 천부적 재능은 극시 〈산의 화환 Gorski vijenac〉(1847)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브란코 라디체비치의 서정시는 세르비아 문학이 그 이전의 교훈적인 목적시와 결별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보다 젊은 낭만파 작가로는 서정시인 요반 요바노비치(즈마이로 알려짐), 주라 약시치, 라자 코스티치 등이 있다.
1870~1900년에는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산문작가는 단편소설의 대가인 라자 라자레비치, 날카로운 관찰력을 보여주는 장편소설과 유머 감각이 뛰어난 단편소설을 쓴 시모 마타불리, 풍자작가이자 유머 작가인 스테반 스레마츠 등이다. 보이슬라브 일리치는 프랑스 고답파를 닮은 서술력이 뛰어난 시인이었다. 19세기말경에 세르비아 문학은 유럽의 경향,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뛰어난 인물로는 요반 두치치, 그리고 우울한 성격의 애국시인 밀란 라키치가 있다.
주관적 시인인 블라디슬라브 펫코비치(디스라고 부름)는 진실과 부조리의 중간쯤 되는 주제를 선택했다. 산문은 객관적 묘사에서 심리적 서술로 바뀌었는데, 보리사브 스탄코비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서정적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세르비아 작가들은 유럽의 주요문학운동을 계속 따랐다. 밀로슈 츠르냔스키와 라슷코 페트로비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모더니즘을 대표한다. 베오그라드의 초현실주의자 집단은 급진적인 좌익 정치의 어투를 도입했고, 일부는 나중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표현 양식에 몰두했다.
1930년대의 문학은 정치적·사회적 주제에 중점을 두고 이전에 활동한 모더니스트들의 내성적 경향을 공격한 것이 특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문학작품 생산은 중단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보 안드리치가 3편의 장편소설, 〈트라브니치크 연대기 Travnička hronika〉(1945)·〈드리나 강의 다리 Na Drini ćuprija〉(1945)·〈아가씨 Gaspodjica〉(1945)를 한꺼번에 발표했다. 그는 196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체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세르비아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과 보다 근대적인 표현 형식을 결합하고 있다. 사실주의적 경향은 전쟁이 끝난 뒤, 미하일로 랄리치의 〈울부짖는 산 Lelejska gora〉(1957)이나 도브리차 초시치의 〈태양은 저 멀리에 Daleko je sunce〉(1951) 같은 전쟁소설과 심리묘사를 강조한 메샤 셀리모비치의 작품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이 경향은 1960, 1970년대에 들어서 동시대적인 무대,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방색이 강한 세르비아의 환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드라고슬라브 미하일로비치와 밀리사브 사비치의 산문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50년대부터 좀더 독창적인 표현 형식을 산문에 도입한 사람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초현실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었던 오스카르 다비초와 전후작가인 미오드라크 불라토비치였다. 이들은 각각 〈시 Pesma〉(1952)와 〈붉은 수탉 Crveni petao leti prema neku〉(1959)을 썼다.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시인은 데산카 막시모비치, 바스코 포파, 스테반 라이치코비치, 미오드라크 파블로비치, 이반 랄리치 등이다.
이후 이루어진 발전으로는 사회적·정치적 목청을 높인 다닐로 키슈의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Grobnica za Borisa Davidoviča〉(1976) 같은 장편소설과 클로코트리잠 그룹의 문학형식에 대한 실험을 들 수 있다.
이 실험의 목적은 예술의 규범과 미학적 기준을 거부하려는 것이었다. 20세기는 다양한 문학 단체의 논쟁이 활발한 시기였다. 20세기초부터 1960년대까지 문학의 표현양식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다. 사실주의적 서술 전통은 세르비아의 기성 문단에서 강력한 지위를 유지했지만, 이 기성 문단은 진보적인 작가들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말부터는 논쟁의 초점이 표현양식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회의 문학에서 정치적·사회적 논평이 차지하는 위치와 문학 작품의 내용으로 옮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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