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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론과 반외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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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학(正學)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

반외세를 주장한 위정척사파는 병인양요 등 외세의 침략과 개화에 반대하여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을미·을사 의병을 일으켜 반일투쟁을 벌였다.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반포되자 이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항쟁을 호소했다.

송병선(宋秉璿)은 〈벽사론 闢邪論〉을 지어 양학의 배격을 주장하고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반대하고,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을 때는 조약의 폐기와 참여한 관리들의 참형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순국했다. 1880년 김홍집(金弘集)이 친중국(親中國)·결일본·연미국(聯美國)의 주장을 담고 있는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들여오자, 다음해 이를 배척하는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 일어났다. 이때 유학생들은 경상도 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려 김홍집을 탄핵했다. 당시 김평묵이 홍재학(洪在鶴)의 이름을 빌려 척사소를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일본과의 개항을 절대 반대하고, 왕에 대해서 극렬한 비난을 했다가 유배당했다.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을 충의사상과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켰으며, 이를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한말 위정척사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대원군에게 왕도정치를 역설했으며, 강화도조약 때는 척왜척화를 내용으로 하는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렸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에 나섰다. 또 이항로의 학맥을 잇는 유인석도 대표적인 항일의병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같이 위정척사론은 주자학적 화이관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나, 현실의 전개에 따라서 이를 반영하여 반외세 민족의식의 형성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김홍집

조선 후기의 문신, 사상가,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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