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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지고 제3공화정이 선포되자 위고는 자신의 맹세를 충실히 지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국민의회 의원(1871)으로 국사에 참여하기로 동의했지만, 1개월 만에 사임했다. 그는 아직도 옛날의 이상을 위해 싸웠지만, 옛날과 같은 정력은 더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망명생활은 그의 노쇠를 재촉했고, 시련은 계속되었다. 1863년에 애인을 찾아 노바스코샤(지금의 캐나다)로 갔던 딸이 그로부터 버림을 받아 9년 뒤에 정신병자가 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1868년에는 아내 아델이 죽어 그를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다. 또 1871년에 한 아들이 죽었고, 1873년에는 또다른 아들이 죽었다. 주위 환경에 더욱 초연해진 시인은 '무서운 해'였던 1870년의 파리 포위를 서술한 〈공포의 해 L'Annéeterrible〉를 써서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는 다가오는 지평선을 응시하며 일을 계속했다.
1871년 3월 파리 포위가 끝난 뒤 맺어진 평화조약에 분노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리에서 권력을 잡고 코뮌이라는 혁명정부를 수립했으나, 이 반란은 5월말에 진압되었다. 위고는 이 혁명정부에 반대하여 다시 브뤼셀로 망명했고, 패배한 반란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뤽상부르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파리로 돌아와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72~73년에 위고는 〈93년 Quatrevingttreize〉을 쓰고 나머지 작품들의 출판준비를 하기 위해 건지 섬에서 지냈다. 1878년에 그는 뇌출혈을 일으켰지만, 파리의 엘로가(街)에서 몇 년 동안 더 살았다. 이 거리는 그의 80세 생일에 빅토르위고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충실한 반려자 쥘리에트가 죽은 지 2년 뒤에 위고도 눈을 감았다. 프랑스는 국장을 치르고, 개선문 밑에 유해를 안치해 두었다가 팡테옹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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