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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의 중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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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는 송가인 〈신문의 난에 부쳐 À la Colonne〉와 〈그 Lui〉 같은 시에서 이상화한 나폴레옹 숭배와 자유를 옹호하여 〈글로브 Le Globe〉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작가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샤를 10세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가운데, 사랑으로 순결해지는 고급 창녀의 이야기인 희곡 〈마리옹 드 로름 Marion de Lorme〉(1829)이 검열에 걸려 무대공연이 금지되자, 위고는 자유주의 쪽으로 더욱 기울어졌다. 그는 당장 〈에르나니 Hernani〉로 응수했는데, 1830년 2월 25일에 초연된 이 희곡으로 젊은 낭만파 작가들은 문학논쟁에서 전통적인 고전주의자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마리옹 드 로름(Marion de Lorme)

ⓒ Collected Dramas of Victor Hugo/wikipedia | Public Domain

이 희곡의 실제적인 충격은 줄거리보다는 오히려 운문의 힘찬 울림과 박자에 있는 것으로, 그 발음과 박자는 에르나니와 도냐 솔이 읊조리는 애조 띤 구절에서만 부드러워졌다. 〈에르나니〉는 한 젊은이가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바치는 작품이었던만큼 그 성공도 학생관중들 덕분이었다.

위고는 처음에는 희곡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1831년에는 루이 11세 치하의 중세 생활을 연상시키는 역사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대성당 부제 프롤로와 군인 푀뷔스라는 인물을 통해 꼽추 콰지모도와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사회를 고발한 작품으로, 이러한 주제는 위고가 일찍이 사형제도에 대한 인도주의적 항의를 제거하기 위해 썼던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 Le Dernier Jour d'un condamné〉(1829)보다 훨씬 더 깊이 대중의 의식을 건드렸다.

나중에 그는 〈클로드 괴 Claude Gueux〉(1834)에서 이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 〈노트르담의 꼽추〉를 쓰고 있는 동안, 입헌군주인 루이 필리프가 7월혁명이 일어난 지 3일 만에 학생과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덕분에 권력을 잡았다. 위고는 그들을 기념하여 〈1830년 7월 이후 Dicté après juillet 1830〉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는 훗날의 많은 정치시의 선구였다. 위고는 7월 왕정시대에 4권의 시집을 냈다. 친근하고 개인적인 문제에서 영감을 얻은 〈가을의 나뭇잎 Les Feuilles d'automne〉(1831), 정치적 경향을 숨김없이 드러낸 〈황혼의 노래 Les Chants du crépuscule〉(1835), 개인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내면의 목소리 Les Voix intérieures〉(1837), 그리고 〈빛과 그림자 Les Rayons et les ombres〉(1840) 등이 그것인데, 이 마지막 시집에서 시인은 이전의 여러 가지 주제들을 되살리면서 색채와 사실적인 세부묘사에 대한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이 시기에는 위고의 창작활동이 매우 왕성하여, 〈마리옹 드 로름〉이 1831년에 마침내 무대에 오른 뒤 잇따라 여러 편의 희곡이 쏟아져나왔다.

여기에는 2가지 동기가 있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정치·사회 사상을 발표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했고, 둘째로는 1833년부터 은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아름다운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에에게 배역을 주기 위해 희곡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쥘리에트는 위고에게 헌신하기 위해 무대에서 은퇴한 뒤, 1883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사려 깊고 충실한 반려자가 되었다.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려고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후 1841년에 마침내 회원으로 뽑혔고, 1845년에는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어,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회·정치 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딸을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했다. 갓 결혼한 그의 딸 레오폴딘은 1843년 9월 남편과 함께 사고로 익사했다. 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는 쥘리에트 드루에와 여행중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보고 그 소식을 알았다. 그는 나중에 〈명상시집 Les Contemplations〉(1856)에 실리게 될 시들을 쓰면서 격렬한 슬픔을 달랬다.

이 시집은 '옛날'과 '오늘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딸이 죽은 순간이 그것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위고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소설을 쓰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특히 한동안 덮어두었던 것을 재집필해 1862년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밖에 화가의 아내인 레오니 비아르라는 작가와 밀애를 나눈 것이나, 루이 필리프 및 그의 며느리 오를레앙 공작부인과 맺고 있던 우정 덕분에 궁정연회에 부지런히 참석한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개인적 슬픔과 사회불안이라는 골칫거리를 잊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이 시기에 쓴 운문과 산문은 그의 심란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며, 사실상 그의 천재성은 슬픔 속에서 성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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