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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덴

다른 표기 언어 Rogier van der Wey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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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99/1400, 프랑스 투르네
사망 1464. 6. 18, 브뤼셀
국적 플랑드르

요약 플랑드르의 화가.
(프). Rogier de la Pasture.

당시 북유럽의 화가들 가운데 얀 반 에이크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종교화이지만 세속적인 그림들(지금은 모두 소실됨)과 섬세한 초상화도 몇 점 그렸다. 칼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신진 계급인 상인과 공인 계급의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쩌면 그는 대학교육까지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1426년 투르네 시에서 '메스트르 로히르 드 라 파스튀르'라는 선생 예우를 받았고, 그 이듬해 약간 늦은 나이인 27세로 화가생활을 시작한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1427년 3월 5일 투르네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화가 조합의 장로인 로베르 캉팽의 화실에 도제로 등록했다.

그는 5년 동안 캉팽의 화실에서 일했으며 1432년 8월 1일에 화가 조합의 일원으로서 독립된 장인이 되었다. 그는 캉팽에게서 그의 초기 그림의 특징인 장황하고 세밀한 사실주의를 배웠으며 실제로 이 두 대가의 화풍은 너무 비슷해서 지금도 일부 작품에 대해서는 제작자를 놓고 미술품 감정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캉팽(그는 웨이덴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서명하지 않음)의 것으로 알려진 모든 그림이 실제로는 웨이덴이 젊은시절에 그린 것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타당성이 없다.

캉팽의 작업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인 자크 다레와 웨이덴의 작품으로 확인된 그림들을 주의깊게 연구해보면, 캉팽의 기본적인 작품들을 재확인할 수 있고 이런 작품들의 화풍과 웨이덴의 화풍을 구별할 수도 있다.

캉팽 이외에 브뤼주 출신의 위대한 화가 얀 반 에이크도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동정녀 마리아를 그리는 성 루카 St. Luke Painting the Virgin〉를 비롯한 그의 초기 작품은 구성 요소에서 대담한 캉팽의 화풍을 보여 주지만 우아하고 섬세한 면에서는 얀 반 에이크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는 캉팽의 도제였던 1427년 당시 투르네를 방문한 얀 반 에이크를 만난 것이 분명하지만, 그가 반 에이크의 화풍을 철저히 알게 된 것은 1432~35년 브뤼헤에서 살던 때였을 가능성이 크다.

원숙한 대가가 된 그는 1426년 브뤼셀 태생의 엘리자베트 호파르트와 결혼했으며 1435년 이후에는 브뤼셀에 정착했다. 이듬해 이 도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플랑드르어로 번역하여 반 데르 웨이덴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고향 투르네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평생 동안 브뤼셀에서 살았다.

브뤼셀 시청으로부터 정의로운 행정을 보여주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을 벽화로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파괴되었음). 같은 무렵인 1435~40년경 루뱅의 궁술가 조합 예배당을 위해 유명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scent from the Cross〉를 완성했다. 이 그림에서는 배경을 협소한 공간으로 축소하고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런 종교적 성격은 그가 1440년대에 그린 쌍둥이 제단화 〈그라나다 미라플로레스 Granada-Miraflores〉와 프랑스 본(디외 저택)에 있는 〈최후의 심판 제단화 Last Judgment Polyptych〉같은 작품에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 그림들의 배경은 간소하고 인물은 섬세한 고딕풍으로서 행동은 조용하면서도 매우 표현적이다. 그의 예술이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중세의 관습으로 되돌아간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고 부르고뉴 공작인 필리프 대공과 그의 유력한 총리 니콜라 로랭 같은 귀족들의 주문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무렵인 144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가장 인기있던 신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글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신학자의 '실제적인 신비주의'는 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및 성인들의 인생에서 일어난 삽화적 사건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감정이입적 반응을 강조했다. 성스러운 안식년인 1450년 로마를 방문했는데, 어쩌면 프랑스 본에 있는 로랭의 예배당에 〈최후의 심판 제단화〉를 설치하러 갔던 길에 로마까지 들렀거나 그의 4명의 자녀 중 딸 마르가레트가 그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딸의 죄를 사면받으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파치오와 쿠사 출신의 유명한 신학자 니콜라스가 그에게 바친 찬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페라라의 유력한 에스테가(家)와 피렌체의 메디치가에서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다. 그는 프란체스코 데스테(원래는 레오넬로 데스테로 생각됨)의 초상화를 그렸고, 아직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남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림에는 메디치가의 문장과 수호 성인들이 그려져 있다.

그는 로마를 순례하는 동안 이탈리아 대가들에게 유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유화는 당시 플랑드르 화가들이 특히 능숙하게 구사하던 기법이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예술을 직접 보고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주로 보수적인 화가이며 자신과 비슷한 중세적 화풍을 가진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프라 안젤리코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좀더 진보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가 북유럽으로 돌아온 직후인 1451~55년에 제작한 〈성 요한 제단화 St. John Altarpiece〉와 〈7대 성사를 그린 3폭 제단화 Seven Sacraments Triptych〉에서는 활기찬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으로 그 특유의 엄격함이 약간 완화되었고, 이들은 하나의 관점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표현 양식이 이처럼 풍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상은 여전히 인습적이어서 인물들을 그림의 전면에 배치하고 주제인 그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환경과 격리시켰다.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가이자 모범적인 시민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았다. 그는 수많은 그림주문을 받았으며 자신의 커다란 작업장에 소속된 화가들의 도움으로 이 주문을 소화했다.

그의 아들 페테르와 그의 후임으로 브뤼셀 시 공식 화가가 된 브랑크 반 데르 스토크트도 이 작업장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부터 자신과 직접 관련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 표현력이 풍부하지만 덜 복잡한 기법을 지닌 그의 화풍이 끼친 영향은 캉팽과 반 에이크의 영향을 능가했다. 다음 세대의 플랑드르 화가들, 즉 페트뤼스 크리스뤼스, 디르크 보우츠, 휘고 반 데르 후스, 그리고 그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던 것으로 추측되는 한스 멤링 등이 모두 그의 방식에 의존했다(플랑드르 미술). 16세기에 퀸텐 마시스와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는 웨이덴의 개념을 약간 변형하여 새로운 활력을 부여했다.

그의 예술은 또한 플랑드르 양식을 유럽 전역에 전달하는 매개 구실을 했고 15세기 후반에 그의 영향은 프랑스와 독일 및 스페인 회화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급격히 쇠퇴했고 그는 어떤 그림에도 서명하거나 제작 연대를 기록하지 않았다. 16세기말 전기 작가 카렐 반 만데르는 그의 저서 〈화가들의 생애 Het Schilderboek〉(1603)에서 웨이덴을 2명으로 잘못 기술했고 19세기 중엽까지는 이미 그의 명성뿐 아니라 예술도 거의 잊혀져 있었다.

지난 세기 동안 학자들이 웨이덴에 관한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덕분에 그의 작품을 재구성하고 15세기 플랑드르의 중요한 대가로서 그의 명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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