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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30년~경,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근처 젤리겐슈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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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94년 8월 11일, 벨기에 브뤼헤 |
국적 | 독일 |
요약 15세기 브뤼헤에서 활동했던 플랑드르 미술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예수 수난>. 초기에는 쾰른의 미술 경향을 익혔고 이후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제자가 되었고 1465년 브뤼헤에 정착한 뒤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멤링은 확립된 구도와 양식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형식적 발전이 이루어진 증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부 표현의 변화는 그의 후원자들의 취향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플랑드르 화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구도와 인물 유형에 의존했다. 이로 인해 20세기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에는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가진 화가'로 일컬어졌다.
브뤼헤가 정치적·상업적으로 쇠퇴하던 시기에 플랑드르 브뤼헤 유파를 이끌었다(플랑드르 미술). 그당시 플랑드르 전역에서 그가 누린 인기는 그를 모방하거나 추종한 사람들의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마지막 주문을 받아 그린 작품은 3폭 제단화 〈예수 수난 Passion Triptych〉(1491) 중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는 패널인데, 이 그림은 오늘날까지 널리 복제되고 있다.
라인 강 중류 지역에서 태어난 멤링은 처음에는 쾰른의 미술 경향을 익혔고, 그다음에는 네덜란드로 가서(1455~60)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문하생이 되어 교육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1465년 브뤼헤에 정착한 그는 커다란 공방을 열고, 수많은 제단화의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석조로 된 큰 저택을 소유했고, 1480년에는 이 도시의 가세 보고서에 가장 부유한 시민의 하나로 기록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470~80년경에 안나 데 발케나레(1487 죽음)와 결혼했고 3명의 아이를 낳았다.
멤링의 작품에는 대부분 서명과 제작연도가 적혀 있고, 다른 작품들도 거기에 묘사된 후원자들을 근거로 하여 미술사가들이 연대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외에는 이 화가의 초기 양식과 중기 및 후기 양식을 구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는 일단 확립된 구도와 양식을 되풀이하여 이용했고, 형식적 발전이 이루어진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그린 성모는 후기로 갈수록 점점 가냘퍼지고 더 영묘하며 내성적이 되었다. 그리고 배경에 토실토실하고 예쁜 아기들과 화관 및 조각의 세부 묘사 같은 이탈리아식 주제를 많이 사용한 것도 후기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초상화도 역시 처음에는 배경을 단순하고 희미하게 처리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한쪽에만 벽이 있는 복도나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이용하여 배경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역시 표현 양식의 발전이라기보다는 후원자들의 취향에 맞는 구도를 채택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학자들이 연대를 추정할 때 어려움을 겪었던 작품의 한 예로 그가 존 돈 경을 위해 그린 3폭 제단화 〈성인들 및 기증자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s and Donors〉(영국 런던 국립미술관)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1468년경에 제작된 상당히 초기 작품으로 알려져왔다. 왜냐하면 그가 이 그림의 주문을 받은 것은 후원자인 존 경이 용맹왕 샤를(부르고뉴 대공)과 요크의 마거릿 결혼식에 참석하러 브뤼헤에 왔을 때였고, 존 경은 그 이듬해(1469) 에지코트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존 경이 1503년까지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 가운데 패널에 부모와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 소녀는 존 경의 딸 앤(1470년 또는 그 이후에 태어남)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그림은 1475년경에 주문을 받아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멤링의 작품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플랑드르 화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브뤼헤 유파의 창시자인 얀 반 에이크의 구도를 차용했다. 또한 반짝이는 거울, 타일을 깐 바닥, 지붕이 달린 침대, 이국적인 벽걸이, 비단으로 짠 긴 겉옷 등 눈길을 끄는 수많은 세부 묘사에서 디르크 보우츠와 휘고 반 데르 후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멤링의 예술은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구도 및 인물 유형을 이해하고 거기에 의존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인 〈동방박사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라는 대형 3폭 제단화(대개 3개의 패널화가 경첩으로 연결되어 있음)와 얀 플로레인스를 위하여 그린 1479년의 제단화(벨기에 브뤼헤 멤링 박물관)에는 로히르의 마지막 걸작인 〈콜룸바의 제단화 Columba Altarpiece〉(1460~64, 독일 뮌헨 고미술관)의 영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멤링이 로히르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콜룸바의 제단화〉 제작을 거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다.
멤링은 또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그린 수많은 반신상 중에서 로히르의 작품을 모방했으며, 〈성모와 마르틴 반 니외벤호베 Madonna and Martin van Nieuwenhove〉(1487, 브뤼헤 멤링 박물관)에서처럼 로히르의 방식에 따라 기증자의 초상이 담긴 펜던트를 그려넣은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은 종교적 주제로 그려진 많은 2폭 제단화들은 15세기 플랑드르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한쪽 패널에 그려진 '기증자' 또는 후원자가 다른 패널에 그려진 성모와 아기 예수를 공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예배용). 이런 그림들은 기증자가 자신의 집에 걸어놓거나 여행할 때 개인적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멤링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브뤼헤의 성 요한네스 병원 같은 종교단체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브뤼헤 시민,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한자 동맹(해외에서 장사를 하는 독일 상인들의 단체)의 외국 대리인들을 비롯한 돈많은 사업가들이었다.
멤링은 메디치 가문의 대리인 톰마소 포르티나리의 주문을 받고 포르티나리 부부의 초상화(미국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와 예수의 수난을 묘사한 22개 이상의 장면이 예루살렘 전경을 둘러싸고 펼쳐져 있는 이색적인 제단화(이탈리아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를 그려주었다.
새로운 예배의식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제단화는 15세기말에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긴 해설을 곁들인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성 요한네스 병원에 있는 호화로운 성 우르술라 유골함이다. 이 작품은 야코사 반 두젤레와 안나 반 덴 모르텔레라는 두 수녀의 주문을 받고 제작되었는데, 이들 수녀는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그림 한귀퉁이에 그려져 있다.
1489년에 완성된 이 유골함은 예배당을 축소한 형태로 되어 있으며, 원래 스테인드 글라스가 들어가야 할 양쪽 옆부분은 6개의 패널화로 채워져 있다. 성 우르술라와 1만 1,000명의 처녀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쾰른에서 로마로 갔다가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해설은 매력적이고 다채로우며 자세하지만, 극적인 묘미나 감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병원의 다른 후원자들은 예수와 성 카이킬리아의 전설적 결혼을 주제로 한 성 요한네스의 커다란 제단화(브뤼헤 멤링 미술관)를 멤링에게 주문했다.
양쪽 패널에 그려져 있는 수호 성인 세례 요한과 복음서의 저자 요한 뒤에는 정교한 해설이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 패널에는 천사들과 카이킬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에게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가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런 구도는 멤링이 그린 수많은 종교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멤링의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영향을 너무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20세기 비평가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갈채를 받았고 브뤼헤의 공증인은 그의 죽음을 기록할 때,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가진 화가'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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